퍼시잭슨과 올림포스의 신 01 - 미스터 D 의 여름캠프 제작일|2014. 04. 07 지은이|릭 라이어던 펴낸곳|한솔수북 전자책값|7,000 원 전자책 _(주)블루마운틴소프트 www.ebookclub.co.kr
이 전자책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어떠한 형태나 수단으로도 재가공할 수 없습니다. 목차 퍼시의 경고 제 1 장 사라진 도즈 선생 제 2 장 양말짜는 세 노파 제 3 장 불길한 여행의 시작 제 4 장 미노타우로스의 추격 제 5 장 미스터 D 의 여름캠프 제 6 장 화장실 사건 제 7 장 신께 올리는 번제 제 8 장 여름캠프와 신의 아이들 제 9 장 사라진 번개를 찾아서 제 10 장 첫 번째 습격 제 11 장 M 아줌마네 가게 부록: 올림포스 12 신과 괴물소개
퍼시잭슨과 올림포스의 신 01 - 미스터 D 의 여름캠프 열두 살의 퍼시 잭슨은 기숙사제 학교에서 또 쫓겨나기 직전이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말썽을 떨칠 수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퍼시가 정녕 왜소한 친구 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기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수학 교사가 괴 물로 변해서 죽이려 드는데 맞서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괴물 사건에 대해서 는 아무도 퍼시를 믿지 않는다. 사실 본인도 믿기 어렵다. 미노타우로스가 여름 캠프로 쫓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갑자기 신화적인 존재들이 그리스 신화책에서 걸어나와 삶에 뛰어드는 것 같 다. 퍼시는 21 세기에도 올림포스 신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리고 더 나쁜 것은, 퍼시가 그 가운데 몇을 화나게 했다는 점이다. 제우스의 번 개 화살이 도둑맞았고, 퍼시가 제일 유력한 용의자다. 릭 라이어던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트레스 나바르(Tres Navarre) 시리즈를 썼 으며, 미스터리 장르 최고의 상 세 개를 휩쓸었다. 지난 15 년 동안 샌프란시스 코 만과 텍사스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텍사스 샌안토니오에서 아내와 두 아 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일러스트 _정서영
퍼시의 경고 내 이름은 퍼시 잭슨. 나이는 열두 살이다. 몇 달 전까지 뉴욕 주 북부에 있는 문제아들을 위한 특수 사립학교 얀시 아카데미의 기숙생이었다 . 뭐, 나도 반쪽 피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지금 이 책을 읽는 이유가 너도 반쪽 피일지 모른다고 생각해서라면 , 당장 책 을 덮으라고 충고하겠다. 엄마나 아빠가 네 출생에 대해 해 주는 거짓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라. 반쪽 피라는 건 위험한 일이다. 아니 끔찍하다. 대부분 고통스럽고 불쾌하게 죽게 된다. 보통 아이라면, 그리고 지금 내 얘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읽어도 좋 다. 계속 읽어라. 난 여기에 적힌 일들 중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는 네가 부럽다. 그러나 만약 이 책을 읽다가 스스로 깨닫게 된다면,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면, 즉시 읽기를 중단해라. 너는 우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리 고 일단 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이 알아채고 네 뒤를 쫓는 것은 시간문 제다. 내가 경고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마라. -퍼시 잭슨
제 1 장 사라진 도즈 선생 내가 문제아냐고? 그렇다.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정도는 내 짧고 비참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라도 증명할 수 있지만, 상황 이 정말로 나빠지기 시작한 건 지난 5 월, 우리 6 학년 학급이 맨해튼으로 현장 학습을 갔을 때부터다. 정신적 도움이 필요한 학생 스물여덟 명과 교사 두 명이 노란색 학교 버스를 타고 고대 그리스 ·로마 유물을 보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으로 향했을 때였다. 나도 안다, 고문처럼 들린다는 걸. 얀시에서 가는 현장 학습은 대부분 고문이 었다. 하지만 이번엔 라틴어를 가르치는 브루너 선생님이 인솔 교사로 나섰기에, 나 는 희망을 가졌다. 브루너 선생님은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중년 남자분이다. 성긴 머리에 꾀 죄죄한 턱수염을 길렀고, 언제나 커피 냄새가 나는 닳아 빠진 트위드 재킷을 입 고 다녔다. 멋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수업 시간에 얘기도 해 주고, 농담도 해 주 며, 게임도 할 수 있게 해 줬다. 게다가 끝내 주는 로마 갑옷과 무기 수집품이 있 어서, 내가 수업 중에 졸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선생님이기도 했다. 나는 현장 학습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최소한 한 번만이라도 말썽에 얽히지 않 기를 빌었다. 내가 잘못된 걸까? 현장 학습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생긴다. 5 학년 때 다닌 학교에서는 사라토가 전쟁터로 갔는데, 독립 전쟁 당시의 대포에서 사고가 났다. 난 학교 버스를 겨 누고 있지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쫓겨났다. 4 학년 때 다닌 학교에서도 마찬가 지다. 마린 월드 상어 저수지에 제작 과정 견학을 갔었는데, 내가 통로 지렛대 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온 학급이 계획에 없던 수영을 했다. 그리고 그 전에 도……. 뭐, 대충 이 정도면 감이 잡힐 것이다. 이번만큼은 착하게 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뉴욕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도벽이 있는 주근깨투성이 붉은 머리의 낸시 보보 핏이 땅콩버터와 케첩 샌드위치 덩어리로 내 제일 친한 친구 그로버의 뒤통수 를 때리는 것을 참아 냈다. 그로버는 손쉬운 표적이었다. 녀석은 몸집이 왜소했고, 좌절하면 울었다. 6 학 년생 중 유일하게 여드름이 났고 턱에 수염도 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몇 학년은 유급한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그로버에게는 신체 장애가 있었다. 그로버는 다리에 일종의 근육병이 있어 평생 체육 수업을 받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걸을 때마다 통증이 오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걸었지만, 그것만 보고 속아서 는 안 된다. 식당에서 엔칠라다(토르티야 사이에 갖은 재료를 넣어 만드는 멕 시코 음식)가 나오는 날 녀석이 뛰는 모습을 봐야 한다. 어쨌거나 낸시 보보핏은 샌드위치 조각을 던져서 그로버의 갈색 곱슬머리에 붙이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어떤 대항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 는 이미 징계를 받은 상태였다. 교장 선생님은 이번 현장 학습 중에 나쁜 일이 나 당황스러운 일, 재미있기만 한 일이라도 벌어지면 죽을 때까지 수업 참가 금 지를 받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가만두지 않겠어.” 내가 중얼거리자 그로버는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했다. “괜찮아. 나 땅콩버터 좋아해.” 그로버는 낸시의 샌드위치 공격을 또 하나 피했다. “더는 못 참아.” 내가 일어서려는데 그로버가 붙잡아 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넌 이미 징계 상태야. 무슨 일이 벌어지면 누가 뒤집어쓸지 알잖아.” 돌이켜보니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낸시 보보핏을 때려눕혔으면 좋았을 걸 하 는 생각이 든다. 내가 곧 휘말리게 될 궁지에 비하면 수업 참가 금지 따위는 아 무것도 아니었는데.
박물관 견학은 브루너 선생님이 인솔했다. 휠체어를 탄 브루너 선생님이 앞장서서 메아리가 울리는 커다란 회랑을 안내 하며, 대리석 조각들이며 정말 오래된 검은색과 오렌지색 단지가 가득 담긴 유 리 진열장들을 짚어 갔다. 문득 이 물건들이 2~3 천 년을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브루너 선생님은 우리를 꼭대기에 커다란 스핑크스가 조각된 4 미터 높이의 돌 기둥 주위에 모아 놓고, 그것이 우리 또래의 여자 아이가 묻힌 무덤 표시 돌인 ‘스텔레’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 말 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지만 주위에 있는 아이들 모두가 떠들어 댔다. 내 가 그 아이들에게 입 닥치라고 할 때마다 보호자로 따라온 도즈 선생이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도즈 선생은 조지아에서 온 수학 교사로 쉰 살인데도 늘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고 다녔다. 할리 데이비슨(세계적인 오토바이 이름)을 몰고 라커룸 안으로 돌진하고도 남을 만큼 성질이 사나웠는데, 이전 수학 선생님이 신경 쇠약에 걸 리는 바람에 학기가 반은 지나서야 얀시에 왔다. 도즈 선생은 학교에 온 첫날부터 낸시 보보핏을 총애했고, 나를 악마의 부하처 럼 여겼다. 도즈 선생이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달콤한 목소리로 “자아, 아가야.”라고 하면 난 한 달 동안 방과 후에 벌을 받게 되는 식이었다. 한번은 도즈 선생이 내게 한밤중까지 옛날 수학 연습장에 적은 답을 지우게 했 다. 난 그로버에게 도즈 선생은 사람 같지 않다고 말했는데, 그로버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브루너 선생님은 계속 그리스의 장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급기야 낸시 보보핏이 스텔레에 조각된 벌거벗은 남자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지껄이며 낄낄거렸을 때 나는 돌아보며 말했다. “입 좀 안 닫을래?” 아뿔싸, 나도 모르게 그만 말이 크게 나와 버렸다. 아이들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브루너 선생님은 이야기를 멈추고 말씀하셨다. “잭슨 군,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브루너 선생님은 스텔레에 있는 그림 하나를 가리켰다. “이 그림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말해 줄 수 있겠지?” 조각을 올려다보니, 알고 있는 내용이라 안도감이 몰려왔다. “자기 아이들을 먹고 있는 크로노스 아닌가요?” 브루너 선생님은 만족스럽지 않은 듯 말했다. “맞다. 그러면 크로노스가 이러는 이유는?” 나는 기억해 보려고 머리를 짜냈다. “어…… 크로노스는 신족의 왕이었고…….” “신족?” 브루너 선생님이 되물었다. “티탄족의 왕이었고.” 나는 말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신이었던 자기 아이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 크로노스 는 자식들을 모두 삼켜 버렸죠. 맞죠? 하지만 크로노스의 아내는 아기였던 제 우스를 감추고 대신 돌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성장한 제우스는 아버지 를 속여서 형제자매들을 토해 내게 했고…….” “웩!” 뒤에서 여자 애 하나가 소리를 냈다. 나는 하던 말을 이었다. “……신과 티탄족 사이에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고, 신들이 이겼습니다.” 웃음소리가 일었다. 내 뒤에서 낸시 보보핏이 친구에게 조잘거렸다. “꼭 실생활에서 써먹기라도 할 것처럼 구네. 입사지원서에 ‘왜 크로노스가 자 기 자식들을 먹었는지 설명하시오.’라고 나오기라도 한대?” 브루너 선생님이 말했다. “그러면 잭슨 군, 보보핏 군의 훌륭한 질문을 바꿔 묻겠네. 이런 문제가 실생활 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것 같은가?” “걸렸네.” 그로버가 중얼거렸다. “닥쳐.” 낸시는 머리카락보다 더 얼굴이 발개져서는 씩씩거렸다.
어쨌든 낸시도 걸렸다. 브루너 선생님은 레이더 같은 귀로 낸시의 못된 말을 잡아내는 유일한 교사였다.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다. 흠, 절반만 맞았다, 잭슨 군. 제우스는 사실 크로노스에게 겨자와 포 도주를 섞어 먹였고, 덕분에 크로노스는 다섯 자녀들을 모두 토해 냈다. 이 아 이들은 물론 죽지 않는 신들이었으므로 크로노스의 위 속에서 전혀 소화되지 않은 채 성장했지. 이 신들은 아버지를 굴복시켜, 아버지가 지닌 낫으로 조각을 낸 다음 지하 세계에서도 가장 어두운 장소인 타르타로스에 뿌렸다. 그나저나 기쁘게도 점심시간이구나 . 도즈 선생님, 우리를 다시 밖으로 인솔해 주시겠습 니까?” 학급은 배를 움켜쥔 여자 아이들과 서로를 밀치며 바보처럼 구는 남자 아이들 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로버와 내가 무리를 뒤따르려 할 때 브루너 선생님이 불러 세웠다. “잭슨 군.” 나는 올 것이 왔음을 예감했다. 그로버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브루너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예?” 브루너 선생님은 상대를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눈빛을 지녔다. 천 년을 살아오 며 모든 것을 본 것 같은 진한 갈색 눈이었다. “자네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배워야만 하네.” “티탄족에 대한 거요?” “실생활에 대한 것. 그리고 공부를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하느냐 하는 것.” “아.” “자네가 내게 배우는 내용은 무척 중요하다네. 자네도 그걸 알고 있었으면 좋 겠군. 난 자네가 최선을 다했을 때만 수긍할 걸세, 퍼시 잭슨 군.” 문득 화가 났다. 브루너 선생님은 나를 너무 밀어붙였다. 물론 선생님이 로마 갑옷을 입고 “야호!”라고 외치며 칼끝 대 분필로 우리에 게 도전해 칠판으로 달려가서 예전에 살았던 모든 그리스 ·로마 사람과 그들의 어머니와 그들이 숭배했던 신들을 열거하게 한 토너먼트 날은 멋졌다. 그러나 브루너 선생님은 내가 다른 학생들만큼 잘하기를 기대했다. 내가 난독증과 주 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가 있으며 평생 C 학점 이상은 받아 본 적이 없다는 사 실에도 불구하고……. 아니다, 선생님은 내가 남들만큼 잘하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기대한 것이다. 나는 그 모든 이름과 사건들을 익 힐 수가 없었다. 철자를 제대로 쓰는 것도 물론 불가능했다. 내가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웅얼거리는 동안 브루너 선생님은 마치 그 소녀 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처럼 오랫동안 슬픈 눈으로 스텔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게 가서 점심을 먹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5 번가를 지나는 사람들이 보이는 미술관 정문 계단께에 모여 있었 다.
머리 위로는 뉴욕 하늘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커먼 구름이 모여들며 엄청 난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온실 효과 때문인지, 크리스마스 이후 뉴욕 주 전 역의 날씨가 괴상했다. 엄청난 눈보라가 몰아쳤고 홍수가 났으며 번개로 인해 산불이 났다. 지금 오는 것이 허리케인이라 해도 놀라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이런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남자 아이들 몇 명은 대형 마트에서 사 온 점심 도시락에 든 과자를 비둘기에게 던져 주고 있었다. 낸시 보보핏은 어느 부인의 핸드백에서 물건을 훔치려 하고 있었고, 도즈 선생 은 당연하게도 그 모습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로버와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분수대 쪽에 앉았다. 그렇 게 하면 다들 우리가 얀시 학교에서,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 버티지 못하는 패배 자들을 위한 특수학교에서 온 줄 모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방과 후 벌칙이야?” 그로버가 물었다. “아니. 브루너 선생님은 아니야. 가끔은 브루너 선생님이 날 그냥 내버려 뒀으 면 좋겠어. 내 말은…… 난 천재가 아니라고.” 그로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뭔가 심오한 철학이 담긴 말로 내 기분을 풀어 주려나 보다 생각하고 있을 때 말을 꺼냈다. “네 사과 먹어도 돼?” 식욕이 별로 없던 터라 그로버에게 사과를 주었다. 나는 5 번가를 따라 내려가는 택시의 물결을 보며 우리가 앉은 곳에서 조금 떨 어진 주택 지구에 있는 엄마의 아파트를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이후 엄마를 보 지 못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엄마는 나를 안으며 반겨 주겠지만, 한편으로는 실망할 것이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면서 얀시로 바로 돌려보낼 것이다. 아무리 이 학교가 6 년 동안 다닌 여 섯 번째 학교이고, 또 한 번 쫓겨날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말이다. 엄마가 슬픈 표정을 짓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브루너 선생님은 장애인용 경사로 밑에 휠체어를 세워 놓고, 소설책을 읽으면 서 셀러리를 먹고 있었다. 휠체어 뒤에 붉은 우산이 비죽 튀어나와 있어서 이동 식 카페 탁자처럼 보였다. 내가 샌드위치 포장을 막 벗기려고 할 때 관광객들 물건을 훔치는 데 싫증이 났는지 못난이 친구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낸시 보보핏이 반쯤 먹다 만 점심을 그로버의 무릎에 쏟았다. “저런.” 낸시는 비뚤어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낸시의 주근깨는 얼굴에 액체 치토스 라도 뿌린 것처럼 오렌지색이었다. 나는 냉정을 지키려고 했다. 학교 상담사는 백만 번이나 말했었다. “열까지 세 면서 화를 다스리렴.” 하지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릿속이 텅 비었고, 귀 울림 도 심해졌다. 낸시를 건드린 기억은 없는데, 다음 순간 낸시가 분수 안에 주저앉아서 빽빽거 리고 있었다. “퍼시가 절 밀었어요!” 도즈 선생이 우리 옆에 나타났다. 아이들 몇이 소곤대고 있었다. “저거 봤……?” “물이…….” “꼭 붙잡는 것처럼…….”
나는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는 거라고는 또 한 번 말썽에 휘말렸다는 것뿐이었다. 도즈 선생은 가엾은 어린 낸시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 미술관 기념품 가게 에서 새 옷을 사 주겠다고 약속하자마자 내게 돌아섰다. 한 학기 내내 기다려 온 일이 벌어졌다는 듯이 도즈 선생의 눈동자에 승리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 었다. “자아, 아가야.”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아요. 한 달 동안 연습장을 지우라는 거죠.” 적절한 대답이 아니었나 보다. “따라와라.” 도즈 선생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로버가 소리쳤다. “잠깐만요! 저였어요. 제가 밀었어요.” 나는 깜짝 놀라서 그로버를 쳐다보았다. 그로버가 나를 보호하려 하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로버는 도즈 선생을 죽도록 무서워했다. 도즈 선생은 그로버의 수염 난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매섭게 노려보더니 말했 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더우드 군.” “하지만…….” “넌, 여기 있어라.” 그로버는 절망적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마음은 고맙다.” 도즈 선생이 짖어 댔다. “아가야, 자.” 낸시 보보핏이 낄낄거렸다. 나는 낸시에게 초특급 ‘나중에 두고 보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런 다음 도즈 선 생을 향해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계단 꼭대기, 미술관 입구에 서서 신경질적으로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올라갔지? 그럴 때가 자주 있다. 내 뇌가 잠에 빠진 상태와 비슷해지고, 다음 순간 뭔가를 놓쳤다는 사실만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마치 우주에서 퍼즐 조각이 하나 떨어 졌는데, 내게는 조각이 떨어져 나간 빈 자리만 보이는 것 같다. 학교 상담사는 내게 이것이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의 일부분이고, 내 뇌가 상황을 잘못 해석해서라고 말했다. 나로선 그렇게 확신할 수 없었다. 도즈 선생을 따라 계단을 반쯤 올라가서 뒤돌아보니, 그로버가 창백해진 얼굴 로 나와 브루너 선생님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선생님이 알아차리기를 바라는 모양이었지만 , 브루너 선생님은 소설책에 빠져 있었다. 다시 위를 올려다보니, 도즈 선생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건물 안에, 현관 홀 끝에 있었다. 아무렴 어떠냐고 생각했다. 기념품 가게에서 낸시한테 줄 옷을 사게 할 모양이 라고. 그러나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도즈 선생을 따라 미술관 깊숙이 들어갔다. 겨우 따라잡았을 때에는 다시 그리스 ·로마 구역에 와 있었다. 회랑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도즈 선생은 그리스 신들이 조각된 거대한 대리석 장식벽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녀는 으르렁거리듯 목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가 아니라도 나는 불안해졌다. 교사와, 특히나 도즈 선생과 단둘이 있 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게다가 마치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듯 신들 이 조각된 대리석 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은……. “넌 우리에게 골칫거리를 안겨 줬다, 아가야.” 나는 안전한 길을 택했다. “네, 선생님.”이라고 말한 것이다. 도즈 선생은 가죽 재킷의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정말 그런 말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눈에는 광기를 넘어선 것이 담겨 있었다. 사악함이었다 .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이 사람은 교사라고 생각했다. 교사가 학생을 해치지는 않을 거라고. “저…… 저,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선생님.” 천둥소리가 건물을 흔들었다. “우린 바보가 아니다, 퍼시 잭슨. 널 알아보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어. 자백해 라. 그러면 덜 고통스럽게 해 주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 낸 것이라곤 교사들이 내가 기숙사 방에서 몰래 팔던 사탕을 어디에 감 춰 두었는지 알아챈 모양이라는 짐작뿐이었다 . 아니면 내가 『톰 소여의 모험』 을 읽지도 않고 인터넷에서 찾아낸 글로 독후감을 제출한 것을 알고는 점수를 깎으려는 건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쁜 경우라면 내게 그 책을 읽히려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 도즈 선생이 물었다. “선생님, 저는…….” “시간 다 됐다.” 도즈 선생은 쉭쉭거렸고, 다음 순간 최고로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도즈 선생 의 눈이 바비큐용 숯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길어지더니 발톱으로 변했다. 재킷은 녹아들어 커다란 가죽 날개가 되었다. 도즈 선생은 인간이 아니 었다. 박쥐 날개와 손톱, 그리고 노란 송곳니가 입에 가득 박힌 노파였고, 나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때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1
분 전까지만 해도 미술관 밖에 있던 브루너 선생님이 펜을 하나 쥐고 회랑 입 구로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어이, 퍼시!” 브루너 선생님은 그렇게 외치면서 펜을 던졌다. 도즈 선생이 나에게 덤벼들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피했고 발톱이 내 귀 옆 공기를 가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허공에 뜬 볼펜을 잡아챘을 때, 내 손에 잡힌 것은 더 이상 펜이 아니었다. 검이 었다. 브루너 선생님이 토너먼트 날마다 쓰던 청동 검이었다.
도즈 선생은 잔인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릎이 흐느적거렸다 . 손이 너무 떨려서 검을 떨어뜨릴 지경이었다. “죽어라, 아가야!” 도즈 선생이 무섭게 외치며 내게 날아왔다. 끔찍한 공포가 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을 했다. 검을 휘둘렀다. 금속 칼날로 도즈 선생의 어깨를 내리치자 마치 물로 만들어진 몸처럼 쓱 빠져 나갔다. 쉭! 도즈 선생은 전기 환풍기에 휘말린 모래성이 되었다. 노란색 가루가 되어 터지 더니 유황 냄새와 짧은 비명 소리, 그리고 아직도 타오르는 두 개의 붉은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사악한 냉기만 남기고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렸다. 나 혼자였다. 손에는 볼펜이 쥐어져 있었다. 브루너 선생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점심 메뉴에 환각 버섯 같은 것이 들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게 전부 내 상상이었을까? 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로버는 분수대 옆에 앉아서 미술관 안내 지도를 머리에 덮어 쓰고 있었다. 낸시 보보핏은 아직도 분수대에 빠졌을 때 젖은 몰골 그대로 못생긴 친구들에 게 툴툴거리며 서 있었다. 나를 보자 낸시가 말했다. “커 선생님이 네 엉덩이를 때려 줬어야 하는데.” 나는 말했다. “누구?” “우리 선생님 말이야, 멍청아!”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우리 학교에 ‘커’라는 교사는 없었다. 나는 낸시에게 무 슨 소리냐고 물었다. 낸시는 눈동자만 굴리더니 돌아섰다. 나는 그로버에게 도즈 선생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누구?” 하지만 그로버는 그렇게 말하기 전에 잠깐 멈칫했고,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 다. 그래서 나는 그로버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재미없어. 이건 진지한 문제라고.” 머리 위에서 천둥이 울렸다. 나는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는 듯 빨간 우산을 펴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브루너 선생님을 보았다. 그쪽으로 다가가니 브루너 선생님은 정신이 다른 데 팔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아, 그건 내 펜이로군. 다음에는 자네 필기구를 가져오게나, 잭슨 군.” 나는 브루너 선생님께 펜을 건네주었다. 그 펜을 아직 쥐고 있다는 사실도 깨 닫지 못했던 것이다. “선생님, 도즈 선생님은 어디 계시죠?” 브루너 선생님이 멍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누구?”
“다른 인솔 교사요. 도즈 선생님, 대수학을 가르치는.” 브루너 선생님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퍼시, 이번 견학에 그런 분은 없다. 내가 아는 한 얀시 아카데미에 도즈 선생 님이라는 분은 한 번도 없었어. 괜찮은 거냐?” 제 2 장 양말짜는 세 노파 가끔 겪는 괴상한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보통 그런 일은 빨리 끝났다. 24 시간씩, 일주일 내내 이어진 이번 환각은 내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남은 학기 내내 온 학교가 내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커 선생님이 크리스마스 때부터 우리에게 대수학을 가르쳤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현장 학습이 끝나고 우리가 버스에 올라타기 전까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원기 왕성한 금발 여자를 말이다. 혹시 걸려드나 보려고 도즈 선생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다들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나조차도 도즈 선생이라는 사람은 존재한 적이 없다고 거의 믿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로버만은 나를 속이지 못했다. 내가 도즈라는 이름을 꺼낼 때마다 멈 칫하며 그런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지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었다. 미술관에서 무슨 일이 정말로 벌어졌었다. 낮에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밤이면 발톱과 가죽 날개 가 달린 도즈 선생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곤 했다. 계속되는 이상 기후도 내 기분을 망쳐 놓았다. 어느 날 밤에는 내가 지내는 기 숙사 창 밖에 뇌우가 불어 닥쳤다. 며칠 뒤에는 허드슨 계곡에서 발생한 토네이 도가 얀시 아카데미에서 80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을 강타했다. 사회 시간에 공부한 최근 사건들 중에는 올해 갑작스러운 돌풍 때문에 태평양에 가 라앉은 소형 비행기가 이례적으로 많다는 소식도 있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에 심기가 뒤틀리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점수가 D 에서 F 로 떨어졌다. 낸시 보보핏 일당과의 싸움도 잦아졌다. 거의 모든 수업 시간에 복도에 나갔다. 마침내 영어 교사인 니콜 선생님이 백만 번째로 나에게 왜 그렇게 철자법 시험 공부에 게으르냐고 묻는 순간 나는 폭발했다. 나는 선생님을 늙다리 주정뱅이 라고 불렀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어감이 좋아서였다. 한 주가 지나자 교장 선생님이 엄마에게 공식적인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듬해 얀시 아카데미에 다시 다닐 수 없을 것이다. 혼자 속으로 괜찮다고 말했다. 좋고말고. 집이 그리웠다. 이스트사이드 위쪽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엄마와 같이 살고 싶었다. 공립학교에 다녀야 하고 밉살맞은 새 아빠와 그가 벌이는 바보 같은 포 커 게임을 참아 내야 한다고 해도. 그래도…… 얀시에는 그리워질 것들도 있었다. 기숙사 창 밖으로 보이는 숲의 풍경, 멀리 보이는 허드슨 강, 소나무 냄새. 조금 이상하지만 좋은 친구였던 그 로버도 그리울 것이다. 나 없이 그로버가 일 년을 어떻게 지낼지 걱정스러웠다 . 라틴어 수업도 그리울 것이다. 브루너 선생님의 미치광이 같은 토너먼트 날과, 잘할 수 있을 거라며 날 믿어 주는 모습도. 시험 주간이 다가오는 동안, 내가 공부한 과목은 라틴어뿐이었다 . 나는 이 주 제가 내게 죽고 사는 문제가 될 거라고 했던 브루너 선생님의 말을 잊지 않았 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선생님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마지막 시험 전날 저녁, 나는 좌절한 나머지 『케임브리지 그리스 신화 가이 드』 책을 기숙사 방 저편으로 던져 버렸다. 단어들이 종이 위를 헤엄쳐 다니며 내 머리 주위를 돌고, 글자들은 스케이트보드라도 타는 것처럼 180 도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키론과 카론, 폴리데크테스와 폴리데우케스의
차이 를 기억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라틴어 동사 변환까지? 관두자. 개미들이 셔츠 속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기분으로 방 안을 오락가락했다 . 브루너 선생님의 진지한 표정과 천 년은 살아온 것 같은 눈을 떠올렸다. ‘난 자 네가 최선을 다했을 때만 수긍할 걸세, 퍼시 잭슨 군.’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신화 책을 집어 들었다. 전에는 교사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없었다. 브루너 선생님과 이야기해 보면 조 언을 해 줄지도 모른다. 최소한 라틴어 시험에서 받게 될 큼지막한 F 학점에 대 해 사과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루너 선생님이 내가 시도해 보지도 않았다고 생각하시게 한 채 얀시 아카데미를 떠나고 싶진 않았다. 나는 교무실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대부분 캄캄했고 비어 있었지만, 브 루너 선생님 방은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창으로 비쳐 나온 불빛이 복도 바닥 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문 손잡이까지 세 걸음 남았을 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브루너 선생이 뭔 가 묻자, 그로버임이 틀림없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퍼시가 걱정돼요.” 나는 얼어붙었다. 엿듣는 취미는 없지만, 단짝 친구가 어른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귀를 쫑긋 세우지 않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바싹 다가서니, 그로버가 말을 하고 있었다. “이번 여름에 혼자 있는 것 말이에요. 학교에 ‘친절한 그들’이 나타났잖아요 ! 이젠 우리도 확실히 알았고 그들도 알…….” “우리가 몰아세워 봐야 일만 더 나빠질 뿐이야. 퍼시가 더 성숙해져야 해.” “하지만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夏至) 기한이…….” “그 문제는 퍼시 없이 풀어야 하네, 그로버. 아직 그럴 수 있을 때 즐기게 놔두 게나.” “퍼시가 그녀를 보았고…….” “상상일 뿐이야.” 브루너 선생님은 그렇게 주장했다. “학생과 직원들을 뒤덮은 ‘안개’라면 퍼시가 믿기에 충분할 걸세.” “전, 전 이번에도 임무에 실패할 순 없어요.” 그로버의 목소리가 감정 때문에 잠겼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잖아요.” 브루너 선생님은 상냥하게 말했다. “자넨 실패하지 않았네, 그로버. 그녀의 정체는 내가 알아봤어야 했어. 이제 내 년 가을까지 퍼시를 살려 둘 걱정이나…….” 힘이 풀리면서 손에서 빠져나간 신화 책이 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브루너 선생님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책을 집어 들고 뒤로 물러났다. 불 켜진 사무실 문 유리 너머로, 휠체어를 탄 브루너 선생님보다 훨씬 큰 키에 손에는 활 같은 것을 든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나는 바로 옆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몇 초 후 둔탁한 나무 둥치가 움직이듯 타각, 타각, 타각 소리가 나더니 문 밖 에서 동물이 킁킁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문 유리 앞에 커다란 검은 형 체가 멈췄다가, 움직였다. 목덜미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복도 어딘가에서 브루너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군. 동지(冬至) 때부터 신경과민이야 .” 그로버가 말했다. “저도 그래요. 하지만 분명히…….” “기숙사로 돌아가게. 내일 긴 시험이 있지 않나.” “그런 거 일깨우지 마세요.” 브루너 선생님 사무실의 불이 꺼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영원 같은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복도로 빠져나가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그로버는 침대에 엎드려서, 밤새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라틴 어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로버는 졸린 눈으로 물었다. “야아, 시험 준비는 잘 돼 가?”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로버는 얼굴을 찌푸렸다. “얼굴이 엉망인데. 괜찮은 거야?” “그냥…… 피곤해서.” 그로버가 내 표정을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고 침대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내 상상이라고 믿고 싶었 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로버와 브루너 선생님이 몰래 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위험한 상태라고 했다. 다음 날 오후, 잘못 표기한 그리스 ·로마 이름들 때문에 눈이 빙빙 도는 상태로 3 시간이나 라틴어 시험을 치르고 나가는데 브루너 선생님이 불러 세웠다. 순간, 전날 밤 내가 엿들은 것을 알아채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그 일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퍼시, 얀시를 떠난다고 해서 너무 실망 말거라. 다…… 네게 좋은 길을 위해 서야.”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그래도 나는 당혹스러웠다 . 아무리 조용히 얘기했다 해 도, 시험을 마친 다른 아이들도 들어 버린 것이다. 낸시 보보핏이 히죽거리며 냉소적으로 입맞춤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우물거렸다. “괜찮습니다.”
“내 말은…….” 브루너 선생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휠체어를 앞뒤로 움직였 다. “여긴 네게 알맞은 곳이 아니야.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 눈이 아파 왔다.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이 반 아이들 앞에서 내가 그동안 감당 하지 못했을 거라고 하고 있다. 일 년 내내 나를 믿는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어차피 쫓겨났을 거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부르르 몸이 떨렸다. “맞아요.” “아니, 아니야. 혼란을 주고 말았구나. 내 말은…… 넌 보통 아이가 아니야, 퍼 시. 그건 나쁜 일이…….” 나는 내뱉듯 말했다. “고맙습니다.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퍼시…….” 그러나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방학식 날, 나는 가방에 옷을 쑤셔 넣었다. 다른 녀석들은 방학 계획에 대해 떠들고 농담하며 돌아다녔다. 한 명은 스위스 로 하이킹을 갈 예정이었고, 한 명은 한 달 동안 배를 타고 카리브 해를 돌 거라 고 했다. 문제 청소년이라는 점은 나와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부자’였다. 회 사 임원이나 외교 대사나 유명 인사를 아버지로 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가정 출신의 아무것도 아닌 아이였다. 그들은 내게도 여름에 뭘 할 건지 물었고, 나는 뉴욕으로 돌아간다고 대답했 다. 여름 동안 개를 산책시키거나 잡지 구독권을 팔아야 하고, 남은 시간에는 가을에 어느 학교로 가게 될지 걱정해야 한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한 아이가 말했다. “아하, 그거 멋지네.” 그리고 이내 나란 존재는 없었다는 듯이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로버에게는 차마 작별 인사를 할 수가 없었지만, 알고 보니 그럴 필요도 없 었다. 그로버는 내가 타기로 한 맨해튼 행 그레이하운드 버스표를 끊어 두었고, 우리는 다시 함께 뉴욕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그로버는 불안한 눈으로 복도를 살피고 다른 승객들을 감시했다. 문득 얀시에서 나올 때마다 그로버가 나쁜 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불 안해하고 안절부절못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전에는 그로버가 괴롭힘을 당할 까 봐 걱정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레이하운드 버스 안에서 그로버를 괴 롭힐 사람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친절한 그들’을 찾는 거야?” 그로버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다시피 했다. “무, 무슨 소리야?” 나는 시험 전날 그로버와 브루너 선생님이 하는 말을 엿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로버의 눈이 씰룩거렸다. “얼마나 들었어?” “많이는 못 들었어. 그런데 하지 기한이 뭐야?”
그로버는 얼굴을 찌푸렸다. “있지, 퍼시. 난 그냥 널 걱정하고 있었을 뿐이야. 악마 수학 선생님에 대한 착 각도 그렇고…….” “그로버.” “그리고 브루너 선생님께 어쩌면 네가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었던 거야. 도즈 선생님이란 분은 없고 또…….” “그로버, 넌 정말 거짓말에 소질이 없어.” 그로버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그로버는 셔츠 주머니에서 지저분한 명함을 꺼냈다. “그냥 이걸 받아. 알았지? 이번 여름에 내가 필요할 경우에 대비해서.” 명함은 장식체로 쓰여 있었는데, 난독증이 있는 나로서는 읽기 힘들어 죽을 지 경이었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로버 언더우드 지킴이 반쪽 피 언덕 뉴욕, 롱아일랜드 (800) 009-0009
“이건 뭐야? 반쪽…….” 그로버는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마! 그건 음, 어…… 내 여름 주소야.”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로버에게 여름 별장이 있었다니. 그로버의 가족이 얀시 에 다니는 다른 아이들만큼 부자일 거란 생각은 한 번도 못했다. 난 우울하게 말했다. “알았어. 그러니까 너희 별장에 가고 싶어지거나 하면 말이지.” 그로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내가 필요할 때.” “내가 왜 널 필요로 하겠어?” 내 의도보다 매정하게 말이 나와 버렸다. 그로버는 목까지 빨개졌다. “저기, 퍼시. 사실은 말이지, 난…… 난 널 보호해야 해.” 나는 그로버를 바라보았다. 얀시에서 나는 일 년 내내 그로버를 괴롭히는 녀석들과 싸워야 했다. 내가 없 으면 내년에 그로버가 두들겨 맞을까 봐 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그런데 자기가 날 지켜 주는 것처럼 굴다니. “그로버, 정확히 무엇으로부터 날 보호한다는 거야?” 발 밑에서 요란한 쇳소리가 났다. 계기판에서 시커먼 연기가 쏟아지더니 버스 안이 썩은 계란 냄새로 가득 찼다. 운전사가 욕을 뱉더니 버스를 고속도로 갓길 에 세웠다. 몇 분 동안 엔진실에서 낑낑거리던 운전사가 모두 내려야겠다고 말했다. 그로 버와 나는 다른 승객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시골길에 서 있었다. 차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있는 줄도 몰랐을 그런 곳이었다. 도로 이쪽에는 단풍나무와 지나는 차들이 버린 쓰레기뿐이었다 . 반 대쪽, 오후의 열기 속에 아지랑이가 흔들리는 4 차선 아스팔트 건너편에는 구식 과일 가게가 있었다. 팔고 있는 과일들은 좋아 보였다. 새빨간 버찌와 사과, 호두, 살구가 상자째 쌓 였고, 얼음이 가득 든 욕조 안에 탄산음료 병이 담겨 있었다. 손님은 없었고, 단 풍나무 그늘에 놓인 흔들의자에 노파 셋이 앉아서 이제껏 본 중에서 제일 큰 양 말을 뜨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양말은 스웨터 크기였는데, 모양은 확실히 양말이었다. 오른쪽에 앉은 노파가 양말 한 짝을 떴다. 왼쪽에 앉은 노파가 다른 한 짝을 떴다. 가운데 앉은 노파는 형광빛의 파란색 털실이 담긴 어마어마하게 큰 바구니를 들고 있 었다. 세 노파 모두 말린 과일처럼 쪼글쪼글하고 창백한 얼굴에 하얗게 센 은빛 머리 털을 흰 손수건으로 잡아매고, 표백한 무명 치마 위로 마른 팔이 삐져나와 있었 다. 그 모습이 굉장히 오래된 느낌을 주었다. 제일 이상한 것은 셋 모두 나를 똑바로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 일에 대해 말하려고 그로버를 돌아보니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로 버는 코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로버? 이봐, 친구.” “저들이 널 보고 있지 않다고 해 줘. 널 보고 있는 거 아니지?” “날 보고 있는데. 이상하지? 저 양말이 나한테 맞을 거라고 생각하나?” “웃을 일이 아니야, 퍼시. 전혀 우습지 않다고.” 가운데 앉은 노파가 원예용 가위처럼 날이 길고 금빛과 은빛이 나는 커다란 가 위를 꺼냈다. 그로버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버스에 타자. 빨리.” “뭐? 그 안은 찜통인데.” “빨리!” 그로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밖에 있었다. 건너편에서는 노파들이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운데 노파가 털실을 잘 랐고, 맹세하건대 나는 4 차선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 속에서도 그 철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양 옆의 두 노파는 형광빛의 파란색 양말을 둥글게 뭉쳤다. 도 대체 누굴 위한 양말인지 궁금했다. 설인일까, 아니면 고질라일까. 버스 뒤쪽에서는 운전사가 엔진실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커다란 금속 덩어리 를 비틀었다. 버스가 부르르 떨리더니 엔진이 살아났다. 승객들이 박수를 쳤다. “그렇지!” 운전사가 외치더니 모자로 버스를 툭 쳤다. “다들 타세요!”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감기에라도 걸린 듯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로버도 상태가 나아 보이지 않았다. 몸을 벌벌 떨면서 이를 맞부딪치고 있었 다. “그로버?” “응?” “나한테 말 안 하는 게 뭐야?” 그로버는 셔츠 소매로 이마를 닦았다.
“퍼시, 과일 가게 뒤에 뭐가 보였어?” “그 할머니들 말이야? 그게 뭐? 그 할머니들…… 도즈 선생 같은 건 아니지?” 그로버의 표정은 읽기 힘들었지만, 나는 과일 가게의 할머니들이 도즈 선생보 다 훨씬, 훨씬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로버가 말했다. “뭘 봤는지 말해 줘.” “가운데 할머니가 가위를 꺼내더니 털실을 잘랐어.” 그로버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을 때와 비슷한 손짓을 했다. 그 손 짓은 성호와는 다른, 뭔가 더 오래된 동작이었다. “실을 자르는 걸 봤단 말이지?” “응.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럴 순 없어.” 그로버가 웅얼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잘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되면 안 돼.” “무슨 지난번?” “언제나 6 학년이야. 6 학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그로버 때문에 정말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로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같이 가게 해 줘. 약속해 줘.” 괴상한 요구였지만 나는 그러겠노라 약속하고 물었다. “무슨 미신 같은 거야?” 답이 없었다. “그로버…… 털실을 자른 것 말이야. 그거 누가 죽을 거라는 뜻이라도 돼?” 그로버는 이미 관 위에 어떤 꽃을 놓아야 좋을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슬픈 눈으 로 나를 쳐다보았다. 제 3 장 불길한 여행의 시작 고백 시간: 나는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그로버를 버렸다. 나도 안다. 못난 짓이었다는 걸. 하지만 그로버가 나를 죽은 사람 보듯 하면서 계속 “왜 늘 이런 일이 생기지?”라든가 “왜 늘 6 학년이어야 하는 거야?”라고 중얼거리는 바람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로버는 당황할 때마다 오줌보가 터졌으므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려 주겠다는 나의 약속을 기어이 받아 놓고 화장실 줄에 섰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첫 번째 택시를 잡아타고 말했다. “이스트 104 번가 1 번 대로요.” 직접 만나 보기 전에 우리 엄마에 대해 한마디 해 두자. 이름은 샐리 잭슨이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다. 이거야말로 제일 좋은 사람들이 제일 고약한 운을 타고난다는 내 이론을 증명한다. 외할머니 외할아
버지는 엄마가 다섯 살 때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고, 엄마는 무관심한 삼촌 손 에 컸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엄마는 훌륭한 창작 글쓰기 프로그램이 있는 대 학의 학비를 모으기 위해 고교 시절 내내 일을 했다. 그런데 삼촌이 암에 걸려 엄마는 졸업 직전에 학교를 그만두고 삼촌을 돌봐야 했다. 삼촌이 돌아가신 뒤 엄마는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졸업장도 없이 홀로 남았다. 엄마에게 좋은 일이라곤 아빠를 만난 것밖에 없었다. 아빠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도 없다. 아마도 미소의 흔적이 아닐까 싶은 따스한 빛 같은 것만 빼면……. 엄마는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다. 슬퍼지기 때문이다. 사진도 한 장 없다. 두 분은 결혼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아빠가 부유하고 중요한 사람이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비밀이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중요한 일로 배를 타 고 태평양으로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는 바다에서 사라졌다고 말했다. 죽은 게 아니라, 바다에서 사라졌다고. 잡다한 일들을 하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야간반을 다니면서 혼자 힘 으로 나를 키웠지만, 엄마는 불평도 하지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단 한 번 도. 하지만 나도 내가 쉬운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마침내 엄마는 가브 우글리아노와 결혼했는데, 이 작자는 처음 30 초 동안만 착하게 굴다가, 세계 정상급 망나니의 본색을 드러냈다. 어렸을 때 나는 가브에 게 ‘구린내 가브’라는 별명을 붙였다.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이 작자는 곰팡이 핀 마늘 피자를 체육복 바지에 싸 놓은 것 같은 냄새를 풍긴다. 우리 둘은 엄마의 인생을 아주 힘들게 만들었다. 구린내 가브가 엄마를 대하는 방식이나 구린내 가브와 나의 관계 등……. 내가 집에 갔을 때가 좋은 예다. 엄마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있기를 바라며 작은 아파트에 들어섰다. 엄마 대신 구린내 가브가 거실에서 친구들과 포커를 치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스포츠 채 널을 시끄럽게 내보내고 있었다. 카펫 위에는 감자 칩과 맥주 캔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가브는 눈도 들지 않고 담배를 문 채 말했다. “그래, 왔구나.” “엄마는 어디 있어?” “일한다. 현금 있니?” 그게 다였다. ‘잘 돌아왔다. 반갑다. 지난 6 개월 동안 어떻게 지냈니?’ 따윈 없 다. 그 사이 살이 찐 가브는 엄니 없는 해마가 헌 옷을 걸친 꼴이었다. 머리카락은 달랑 세 가닥뿐이었는데 , 그렇게 하면 잘생겨 보일 줄 아는지 대머리 위로 가지 런히 빗어 넘겼다. 가브는 퀸즈에 있는 전자제품 상점에서 일했는데, 거의 집에만 있었다. 가브가 오래 전에 해고당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그는 월급을 챙겨서 고린내 나는 담배와, 당연하게도 맥주를 사는 데 쏟아 부었다. 언제나 맥주였다. 내가 집에 갈 때마다 가브는 내가 도박할 돈을 내놓기를 기대했다. 그걸 ‘남자들끼리의 비밀’이라고 불렀는데, 엄마한테 말했다가는 가만 안 두겠다는 뜻이었다. “돈 없어.” 내 말에 가브는 기름기 흐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브는 블러드하운드 (수색용 경찰견으로 쓰이는 개의 한 품종)처럼 돈 냄새를 잘 맡았다. 자기 냄새가 다른 모든 냄새를 뒤덮을 지경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 이었다. 가브가 말했다. “너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택시를 탔지? 아마 20 달러 냈을 거고, 거스름돈으로 6~7 달러를 받았겠구먼. 이 지붕 아래서 살려면 자기 몫을 해야지. 내 말이 틀 려, 에디?”
아파트 건물 관리인인 에디는 불쌍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관둬, 가브. 막 왔잖아.” “내 말이 틀리냐고?” 가브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에디는 못마땅한 얼굴로 프레첼(빵과자의 한 종류)그릇을 들여다보았다. 나머지 둘은 사이좋게 방귀를 뀌었다. “알았어.” 나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탁자 위에 던졌다. “지길 빌어 줄게.” 가브는 내 뒤에 대고 소리쳤다. “네 성적표 왔다, 똑똑아! 나라면 그렇게 거만하게 굴지 않을 거야!” 나는 방문을 쾅 닫았다. 내 방이라곤 하지만 실제로 내 방도 아니었다. 학교에 가 있는 동안은 가브의 ‘서재’였다. 가브는 그 방에서 오래된 자동차 잡지 말고 는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았지만, 내 물건을 옷장 속에 처박아 두고 내 방 창틀 에 진흙투성이 장화를 올려놓고 방 안에서 역겨운 향수와 담배와 김빠진 맥주 냄새가 나게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침대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즐거운 나의 집이다. 가브의 냄새는 거의 도즈 선생에 대한 악몽만큼이나 , 혹은 과일 파는 노파가 털실을 자르던 소리만큼이나 끔찍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공포에 질린 그로버의 표정 과, 녀석이 자기 없이 나 혼자 집에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던 것을 떠올 렸다. 갑자기 한기가 돌았다.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지금 나를 찾아서 길고 끔 찍한 발톱을 세우며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퍼시?” 엄마가 침실 문을 열자 내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엄마는 방 안에 걸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내 기분을 돌려놓는다. 엄마의 눈은 빛에 따라 다른 색으로 반짝인다. 엄마의 미소는 퀼트 이불처럼 따스하다. 긴 갈색 머리에 회색 머리카락이 몇 가닥 섞여 있지만, 엄마 나이가 많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를 볼 때면 엄마는 내 나쁜 점은 하나도 보지 않고 좋은 점만 보는 것 같다. 나는 엄마가 누구에게도 언성을 높이거나 퉁명스럽게 말하 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다. 심지어 나나 가브에게조차도 . 엄마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 퍼시. 믿을 수가 없구나. 크리스마스 때보다 더 자랐잖아.” 엄마가 입은 빨강 하양 파랑 세 가지 빛깔의 ‘달콤한 아메리카’ 제복에선 세상 에서 제일 좋은 냄새가 났다. 초콜릿, 감초, 그밖에 엄마가 그랜드센트럴에 있 는 사탕 가게에서 파는 온갖 사탕들의 냄새. 엄마는 내가 집에 올 때면 늘 그랬 듯 커다란 ‘공짜 사탕’ 봉지를 챙겨 왔다. 우리는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내가 새콤한 블루베리 사탕을 연달아 입속 으로 넣는 동안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편지에 적지 않은 모든 일을 알고 싶어 했다. 내가 쫓겨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엄마의 귀여운 아들이 괜찮으냐는 것이었 다. 나는 엄마 때문에 숨이 막힌다고 그만 하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엄마를 보게 되 어 정말 기뻤다. 다른 방에서 가브가 고함을 질렀다.
“샐리, 콩 소스 어떻게 됐어?” 나는 이를 갈았다.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여자다. 가브 같은 망나니가 아니라 백만장자와 결혼했어야 마땅하다. 엄마를 위해 나는 얀시 아카데미에서 보낸 마지막 날들을 즐겁게 그리려고 애 썼다. 제명당한 것도 그렇게 실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1 년 가까이 버티지 않았는가,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다, 라틴어 수업은 꽤 잘했다, 그리고 솔직히 내가 휘말린 싸움은 교장 선생님이 말한 것만큼 지독하지 않았다, 나는 얀시 아카데미를 좋아했다……. 정말로 그랬다고 늘어놓았다. 그 해 학교 생활 을 어찌나 그럴싸하게 꾸며 냈던지 스스로도 그렇게 믿을 지경이었다. 그로버 와 브루너 선생님을 생각하니 목이 메어 왔다. 심지어 낸시 보보핏조차 갑자기 그렇게 나쁘지 않게 여겨졌다. 미술관에 가기 전까지는. “뭐라고?” 엄마가 물었다. 엄마의 눈빛이 내 양심에 달라붙어 비밀을 끌어내려고 했다. “뭔가 무서운 일이 있었니?” “아냐, 엄마.” 거짓말을 하는데 죄책감이 느껴졌다. 도즈 선생과 털실을 들고 있던 세 노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바보스럽게 들릴 것 같았다. 엄마는 입술을 오므렸다. 내가 뭔가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강요하지는 않았다. “깜짝 선물이 있어. 우린 해변에 갈 거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몬토크에?” “3 박 4 일이야. 같은 오두막에서.” “언제?” 엄마는 미소지었다. “엄마가 옷만 갈아입으면 바로.”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와 내가 여름에 몬토크에 가지 못한 지 2 년이었다. 가 브가 돈이 없다고 해서였다. 가브가 문 앞에 나타나서 으르렁거렸다. “콩 소스는, 샐리? 내 말 못 들었어?” 한 대 때려 주고 싶었지만, 엄마와 눈을 맞추자 엄마가 나에게 거래를 제안하 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브에게 잠시만 얌전히 굴어라. 엄마가 몬토크 로 떠날 준비를 다 할 때까지만. 그런 다음 여기서 나가는 거야.’ 엄마는 가브에게 말했다. “지금 가요.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가브의 눈이 작아졌다. “여행? 그거 진심이었어?” 나는 웅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 안 보내 줄 거야.” 엄마는 평온하게 말했다.
“보내 주고말고. 너희 새아버지는 그저 돈 걱정을 하고 있을 뿐이야. 그게 다라 고. 게다가 가브리엘은 콩 소스로 만족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주말 내내 먹을 만큼 넉넉하게 일곱 가지 소스를 만들어 줄 테니까. 과카몰리(아보카도를 으깨 어 토마토와 양파 등을 더한 멕시코 소스)에 사우어 크림까지. 전부 다.” 가브가 약간 누그러졌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비는…… 당신 옷값에서 대는 거지?” “그럼요, 여보.” “그리고 내 차는 거기 갔다가 돌아오는 데만 쓰는 거고.” “아주 조심할게요.” 가브는 두 겹으로 된 턱을 긁었다. “그 일곱 가지 맛 소스를 얼른 만들어 준다면. 그리고 저놈이 포커 게임을 방해 한 것만 사과한다면.” 내가 네놈 급소를 걷어차서 일주일 동안 소프라노로 노래하게 해 주면 어떨까. 그러나 엄마의 눈빛이 가브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왜 엄마는 이 사람을 참아 주는 걸까?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왜 가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음을 쓰는 걸까? 나는 웅얼거렸다. “미안해요. 끝내 주게 중요한 포커 게임을 방해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부디 당 장 게임으로 돌아가시죠.” 가브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 가브의 조그만 뇌로는 내 말에 담긴 비아냥거림 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래. 아무려나.” 가브는 결국 그렇게 말하고 게임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말했다. “고맙다, 퍼시. 일단 몬토크에 가면 더 얘기하자꾸나 . 네가 깜박하고 말하지 않 은 일들에 대해서 말이야. 괜찮겠지?” 순간 나는 엄마의 눈에서 불안을,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그로버가 보였던 것 과 같은 두려움을 보았다. 마치 엄마도 공기 중에 떠도는 기묘한 차가운 기운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고, 나는 잘못 본 거라고 생각 했다. 엄마는 내 머리를 헝클어뜨린 다음 가브에게 일곱 가지 소스를 만들어 주 러 갔다. 한 시간 뒤 떠날 준비가 됐다. 가브는 내가 엄마 가방을 차까지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볼 만큼 오랫동안 포커 게임을 중단하고 나왔다. 가브는 주말 내내 엄마의 요리를 먹지 못하는 것에, 그보다 더 중요한 건 1978 년형 카마로(Camaro: 자동차 이름)를 주말 내내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계속 투덜거렸다. 내가 마지막 가방을 싣자 가브가 말했다. “흠집 하나도 내면 안 된다, 똑똑아. 어디 긁히기만 해 봐.” 내가 운전이라도 하는 줄 아나! 난 열두 살이란 말이다. 하지만 가브에게는 전 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갈매기가 페인트칠을 망치더라도 내게 잘못을 돌릴 방 법을 찾아낼 테니까. 가브가 비척비척 아파트 건물 안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던 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설명하기 힘든 행동을 했다. 가브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로버가 버스 안에서 하던, 성호를 긋는 것과 비슷한 손짓을 했다. 심장
위에서 다섯 손가락 을 구부렸다가 가브 쪽으로 민 것이다. 그러자 덧문이 쾅 닫히면서 엉덩이를 후 려치는 바람에 가브는 대포에서 발사된 것처럼 위층으로 밀려 올라갔다. 그냥 바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 경첩이 이상해진 건지도 모르지만 이유를 알아 낼 만큼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나는 카마로에 올라타고 엄마에게 얼른 출발하자고 말했다. 우리가 빌린 오두막은 롱아일랜드 끝자락에서 벗어난 남쪽 해안에 있었다. 빛 바랜 커튼이 달린 작은 파스텔 톤의 상자로 모래 언덕 속에 파묻히다시피 한 상 태였다. 침대 시트에는 언제나 모래가 있었고, 찬장에는 거미가 들어 있었으며, 바다는 수영하기에 너무 차가웠다. 난 그곳이 정말 좋았다. 엄마와 나는 내가 아기였을 때부터 그곳에 가곤 했다. 엄마는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갔을 것이다. 한 번도 확실하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나는 이 해안이 엄 마에게 특별한 곳임을 알고 있다. 바로 엄마가 아빠를 만난 장소였다. 몬토크에 가까워질수록 엄마는 점점 젊어지는 것 같았다. 얼굴에서 걱정과 일 에 찌든 세월의 흔적이 사라져 갔다. 엄마의 눈동자는 바다 빛으로 변했다. 우리는 해질 녘에 도착해서 오두막 창을 모두 열어젖히고 늘 하던 대로 청소부 터 했다. 해변을 산책하고, 갈매기들한테 파란색 옥수수 칩을 던져 주고, 파란 색 젤리빈이나 짠맛이 나는 파란색 태피 사탕, 그밖에 엄마가 일터에서 가져온 온갖 공짜 사탕들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아마도 파란색 음식에 대해 설명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한번은 가브가 엄마에게 파란색 음식 같은 건 없다고 말했었다. 두 사람은 그 문제로 말다툼을 했는데, 그때는 정말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때부터 일부러 파란색 음식을 먹었다. 파란색 생일 케이크를 굽고, 블루베리 를 갈아서 스무디를 만들었다. 파란색 옥수수 토르티야 칩을 샀고, 가게에서 파 는 파란색 사탕을 가져왔다. 이런 일들은 엄마가 우글리아노 부인이라고 자칭 하는 대신, 처녀 때 성인 잭슨을 고수하는 것과 더불어 엄마도 가브에게 완전히 넘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엄마도 나처럼 저항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우리는 모닥불을 피우고 핫도그와 마시멜로를 구웠다. 엄마 는 어릴 적 엄마의 부모님이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이 야기해 줬다. 언젠가 사탕 가게를 그만둘 만큼 돈을 모았을 때 쓰고 싶은 책들 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나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몬토크에 갈 때마다 생각해 온 문제를 물어보았다. 아빠에 대한 거였다. 엄마의 눈이 흐려졌다. 늘 똑같은 이야기를 해 주리란 것 을 알았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네 아빠는 친절했단다, 퍼시. 키가 크고 잘생기고 힘도 셌지. 하지만 부드럽기 도 했어. 아빠도 너처럼 검은 머리란다. 눈동자도 녹색이었고.” 엄마는 사탕 봉지에서 파란색 젤리빈을 찾아냈다. “그이가 널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정말 자랑스러워할 거야.” 나는 어떻게 엄마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한테 훌륭한 부분이 뭐가 있다고? 독서 장애와 과잉 행동 장애가 있는데다 D+ 성적표를 받고 6 년 동안 여섯 번이나 학교에서 쫓겨난 남자아이가? 나는 물었다. “난 몇 살이었어? 그러니까 아빠가…… 떠났을 때?” 엄마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네 아빠는 나와 여름 한 철밖에 같이 있지 않았단다, 퍼시. 바로 이 해변에서 말이야. 이 오두막에서.”
“그래도 나를 알았을 거 아냐.” “아니. 내가 아기를 낳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널 본 적은 없어. 네가 태어나기 전에 떠나야 했거든.” 나는 그 말을, 내가 아빠에 대해 뭔가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과 일치 시키려고 노력했다. 따스한 빛, 미소……. 나는 언제나 아빠가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엄마는 그렇게 말해 준 적 이 없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그럴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가 한 번도 나를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듣자 아빠에게 화가 났다. 바보 같은 소리인지도 모 르지만, 엄마와 결혼할 배짱이 없었던 것도, 항해를 떠나 버린 것도 화가 났다. 아빠는 우리를 버렸고, 지금 우린 구린내 가브와 붙어 있지 않은가.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날 다시 떠나보낼 거야? 다른 기숙학교로?” 엄마는 불에서 마시멜로를 꺼냈다. “모르겠구나.” 목소리가 무거웠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하긴 해야겠지만.” “내가 가까이 있는 게 싫어서?” 말을 내뱉자마자 그런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오, 퍼시. 아니야, 난…… 난 그래야 해. 널 위해서 널 보내야 해.” 그 말을 듣자 브루너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얀시를 떠나는 것이 나를 위한 가장 좋은 길이라던. 나는 말했다. “내가 정상이 아니니까 말이지.” “나쁜 일인 것처럼 말하는구나, 퍼시. 하지만 넌 네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있어. 엄마는 얀시 아카데미라면 충분히 멀다고 생각했었어. 마침내 네가 안전 해졌다고 믿었어.” “뭐로부터 안전하다는 거야?”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기억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내게 일어났던 온갖 괴상하 고 무서운 일들, 내가 잊으려고 했던 일들이. 3
학년 때는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놀이터에서 나에게 접근했었다. 교사들이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하자 으르렁거리면서 가 버렸지만, 내가 그 남자의 챙 넓은 모자 아래로 눈이 하나밖에 없다고, 게다가 외눈이 이마 한가운 데 붙어 있더라고 말하자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 전에는…… 정말 어릴 때 기억이다. 나는 보육원에 있었는데, 한 선생님이 낮잠을 재운다는 것이 우연히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침대에 나를 눕혔다. 나를 데리러 온 엄마는 내가 토실토실한 아기 손으로 뱀을 목 졸라 죽이고 나서, 길 고 비늘이 있는 밧줄 같은 뱀 거죽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 다. 어느 학교에서나 뭔가 소름끼치는 일, 위험한 일이 일어났고 나는 학교를 옮겨 야 했다. 나는 엄마에게 과일 가게에 있던 노파들에 대해, 그리고 미술관에서의 도즈 선 생에 대해, 검으로 수학 교사를 동강 내어 먼지로 만들어 버린 내 기묘한 환각 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 일을 이야기하는 순간 몬토크 여행은 끝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건 싫었다. 엄마가 말했다.
“난 너를 가능한 한 곁에 가까이 두려고 했단다. 그들은 실수하는 거라고 했지. 하지만 다른 선택은 하나뿐이었어 . 퍼시, 네 아빠가 널 보내고 싶어 하던 곳이 있단다. 그런데 난, 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아빠가 날 특수학교에 보내고 싶어 했다고?” 엄마는 부드럽게 말했다. “학교가 아니야. 여름캠프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째서 아빠가 내가 태어나는 것도 보지 못할 만큼 짧게 머물렀다면서 엄마에게 여름캠프 이야기를 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중요 한 일이라면 왜 엄마는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엄마는 내 눈빛을 읽고 말했다. “미안하다, 퍼시. 하지만 말할 수가 없었어. 난, 난 널 그곳에 보낼 수가 없었 어. 영영 헤어지는 일이 될 수도 있거든.” “영영? 하지만 여름캠프일 뿐이라며.” 엄마는 모닥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물어봤다간 울음을 터뜨릴 게 분명했다. 그날 밤 나는 생생한 꿈을 꾸었다. 해변에 폭풍이 불고 있었고 두 마리의 아름다운 동물이, 흰 말과 금빛 독수리 가 파도 가장자리에서 서로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독수리가 날아 내려 거대한 발톱으로 말의 주둥이를 베었다. 말은 두 다리로 일어서서 독수리의 날개를 찼 다. 둘이 싸우는 동안 땅이 흔들리더니 땅 밑에서 끔찍한 목소리가 낄낄거리면 서 더 거세게 싸우라고 두 동물을 부추겼다. 나는 그 둘이 서로를 죽이지 않게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 쪽으로 달려갔 지만, 달리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나는 내가 너무 늦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독 수리가 크게 뜬 말의 눈에 부리를 겨누고 날아 내리는 것을 보고서 비명을 질렀 다. 안 돼! 나는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밖에 정말로 폭풍이 불고 있었다. 나무가 쪼개지고 집이 쓰러질 정도의 폭풍이 었다. 해변에는 말도, 독수리도 없었다. 대낮처럼 밤을 밝히는 번갯불과 대포처 럼 모래 언덕을 두드리는 6 미터 높이의 파도만이 있을 뿐이었다. 천둥이 다시 한 번 치자 엄마가 깨어났다. 엄마는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일어 나 앉아서 말했다. “허리케인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롱아일랜드는 초여름에 허리케인을 맞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바다는 그 사실을 잊은 것 같았다. 요란한 바람 소리 너머 멀리서 머리 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고통스럽고 성난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러더니 훨씬 가까운 곳에서, 망치가 모래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우리 오두막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엄마는 잠옷을 입은 채 침대에서 튀어 나가 자물쇠를 열었다. 문 앞에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등지고 그로버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로버가 아니기도 했다. 그로버가 헐떡이며 말했다. “밤새도록 찾으러 다녔어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엄마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그로버가 아니라 그로 버가 온 이유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빗소리 너머로 내가 들리도록 외쳤다.
“퍼시,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나한테 하지 않은 이야기가 뭐야?” 나는 얼어붙은 듯 그로버를 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로버가 외쳤다. “오 제우 카이 알로이 데오이! 바로 우리 뒤에 있어요! 엄마한테 말씀 안 드렸 어?” 나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로버가 고대 그리스어로 욕을 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내가 그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로버가 한밤중에 혼자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생각하지 않 았다. 왜냐하면 그로버가 바지를 입고 있지 않았고…… 다리가 있어야 할 곳 에……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 엄마가 엄한 얼굴로 나를 보며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퍼시, 당장 말해!” 나는 더듬거리면서 과일 가게에 있던 노파들과 도즈 선생에 대해 이야기했고, 엄마는 번갯불 빛 속에서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핸드백을 움켜쥐고 내게 우비를 던진 다음 말했다. “차에 타, 둘 다. 얼른!” 그로버는 카마로 쪽으로 뛰었다. 아니, 그보다는 텁수룩한 뒷다리를 흔들며 달 렸다고 해야 맞겠다. 갑자기 그로버의 다리에 있다던 근육병 이야기가 수긍이 갔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뛰면서 걸을 때는 절뚝거렸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로버의 발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발 대신 갈라진 발굽이 있었다. 제 4 장 미노타우로스의 추격 우리는 밤을 뚫고 캄캄한 시골길을 내달렸다. 바람이 자동차의 차체를 두들겼 다. 빗줄기가 앞 유리를 후려쳤다. 나는 엄마가 어떻게 앞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엄마는 계속 가속 페달을 밟았다. 번갯불이 번쩍일 때마다 나는 뒷좌석에 같이 앉은 그로버를 보면서 내가 미친 걸까, 아니면 그로버가 북슬북슬한 모직 바지를 입은 걸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 니었다. 유치원 때 어린이 동물원에 가서 맡은 기억이 있는 냄새가 났다. 양모 나 라놀린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 농장 동물들이 젖었을 때 나는 냄새였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너랑 우리 엄마랑…… 아는 사이야?” 뒤쫓아 오는 차도 없는데 그로버의 눈은 계속 뒷거울을 흘끔거렸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 직접 만난 적은 없거든. 그래도 내가 널 지켜보고 있다는 건 알고 계셨지.” “날 지켜봐?” “널 감시했지. 네가 괜찮은지 보는 거였어. 하지만 가짜로 친구 노릇을 한 건 아냐.” 그로버는 얼른 덧붙였다. “난 지금도 네 친구야.” “음, 네 정체가 정확히 뭐야?”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 않다고? 제일 친한 친구의 허리 아래가 당나귀인데…….” 그로버는 목구멍으로부터 날카롭게 “부르르르.” 소리를 냈다.
전에도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라 고만 생각했다. 이제 보니 화난 울음소리에 더 가까웠다. “염소야!” 그로버가 외쳤다. “뭐라고?” “난 허리 아래로 염소라고.” “방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더니.” “부르르르!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널 밟아 뭉개려고 할 사티로스가 한둘 이 아닐걸!” “와우! 잠깐. 사티로스라……. 그러니까, 브루너 선생님의 신화 같은 거 말이 야?” “과일 가게에 있던 노파들이 신화였어, 퍼시? 도즈 선생이 신화였어?” “그러니까 도즈 선생이 있었다는 걸 인정한 거네!” “당연하지.” “그런데 왜…….” “아는 게 적을수록 괴물들의 공격을 덜 받으니까.” 그로버는 이렇게 명쾌할 수 있냐는 듯이 말했다. “우린 인간들의 눈에 ‘안개’를 씌웠어. 너도 ‘친절한 그들’이 환상이었다고 생 각하길 바랐지.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어. 네 스스로 정체를 깨닫기 시작했으 니까.” “내 정…… 잠깐만, 무슨 뜻이야?” 뒤쪽 어딘가, 전보다 가까운 곳에서 다시 한 번 기묘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 리를 뒤쫓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여전히 쫓아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엄마가 말했다. “퍼시, 설명할 게 너무 많지만 시간이 없다. 널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야 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안전한 곳인데? 누가 날 쫓는 건데?” 그로버가 당나귀라는 말에 발끈해 있는 것이 분명한 투로 대꾸했다. “아, 대단한 작자는 없지. 죽음의 지배자와 피에 굶주린 그 부하 몇 명뿐이야.” “그로버!” “죄송합니다, 잭슨 부인. 속도를 더 내실 순 없나요?”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서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꿈 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 상상력이 별로 없다. 이렇게 이상한 꿈은 꿀 수조차 없었다. 엄마는 차를 거칠게 왼쪽으로 틀었다. 우리는 더 좁은 길로 들어서서, 어둠에 잠긴 농장 저택과 나무가 우거진 언덕과 흰색 말뚝 울타리에 걸린 ‘딸기를 직 접 따 가세요’라고 적힌 표지판들을 지나치며 달렸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내가 물었다. “내가 얘기했던 여름캠프.” 긴장된 목소리였다. 엄마는 내가 겁먹지 않도록 애쓰고 있었다. “아빠가 널 보내고 싶어 했던 곳.”
“엄마는 안 보내고 싶었다던 곳이잖아.” “제발, 아가야.” 엄마는 간곡히 말했다.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 이해해 주렴. 넌 위험에 빠져 있어.” “이상한 할머니들이 털실을 잘랐기 때문에?” 그로버가 끼어들었다. “할머니들이 아니야. 운명의 세 여신이었어. 그들이 네 앞에 나타났다는 게 무 슨 뜻인지 알아? 그들은 네가…… 누군가가 죽기 전에만 나타나.” “뭐? 지금 ‘너’라고 했어?” “아니 안 그랬어. ‘누군가’라고 했지.” “나를 생각하면서 ‘네가’라고 했잖아.” “내가 ‘네가’라고 한 건 ‘누군가가’라는 뜻이었어. 퍼시 너라는 뜻이 아니라.” “얘들아!” 엄마가 외쳤다. 엄마는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확 꺾었고, 나는 엄마가 피하려고 했던 형체를 흘 끗 볼 수 있었다. 우리 뒤에 폭풍 속으로 사라진 어둡게 일렁이는 형체를. “뭐였어?” 엄마는 내 질문을 무시하고 말했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돼. 제발, 제발, 제발…….” 어디에 거의 다 왔다는 건지 몰랐지만, 어느새 나도 몸을 앞좌석 쪽으로 내밀 고 어서 도착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밖은 캄캄한 밤이었고, 거센 빗줄기 속에 롱아일랜드 끝자락에서 볼 수 있는 한적한 시골 풍경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도즈 선생을, 또 도즈 선생이 날카로 운 이빨과 가죽 날개가 달린 괴물로 변했을 때를 생각했다. 뒤늦은 충격으로 팔 다리가 저려 왔다. 그 여자는 정말로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로 나를 죽 이려고 했다. 브루너 선생님과 그때 선생님이 내게 던져 줬던 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로 버에게 그 일에 대해 묻기 전에 목덜미의 잔털이 쭈뼛 섰다. 눈이 멀 것 같은 환 한 빛이 번쩍 하더니 턱이 덜걱거리는 쿵! 소리가 나고, 우리 차가 폭발했다.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차가 짜부라지고 불에 타는 동시에 물에 씻긴 것 같았음 을 기억한다. 나는 운전석 뒤에서 이마를 떼어 내며 말했다. “아야.” “퍼시!” 엄마가 외쳤다. “난 괜찮아.” 고개를 흔들어 어지러움을 떨쳐 내려고 했다. 나는 죽지 않았다. 자동차도 실 제로 터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도랑에 처박혀 있었다. 운전석 옆문이 진흙에 박혀 있었다. 지붕이 달걀 껍데기처럼 떨어져 나간 사이로 빗줄기가 쏟아져 들 어오고 있었다. 번개. 설명할 방법이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우린 길 한가운데에서 번개를 맞은 것이다. 내 옆에는 큰 덩어리 하나가 꼼짝 않고 있었다.
“그로버!” 그로버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로버의 털투성이 엉덩이 를 흔들면서 생각했다. 안 돼! 아무리 반은 농장 동물이라도 넌 내 제일 친한 친 구고 네가 죽는 건 싫어! 그 순간 그로버가 “먹자.”고 하는 바람에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퍼시, 우린…….” 말하던 엄마 목소리가 작아졌다. 뒤를 돌아보니 진흙이 튄 유리 너머로, 번갯불 속에서 우리를 향해 갓길 위를 쿵쿵 걸어오는 형체가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미식축 구 선수같이 몸집이 큰 남자의 검은 윤곽선. 머리 위로 담요를 뒤집어쓴 것 같 은 모양새였다. 상체는 퉁퉁했고, 보풀 같은 것이 많았다. 들어 올린 손은 마치 뿔처럼 보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엄마가 무서울 정도로 심각하게 말했다. “퍼시, 차에서 나가라.” 엄마는 운전석 옆문으로 몸을 던졌지만, 그쪽은 진흙 때문에 꽉 막혀 있었다. 내가 앉은 옆문도 밀쳐 보았다.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절망해서 지붕에 난 구멍을 보았다. 나갈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가장자리가 지글거렸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엄마가 말했다. “조수석 쪽으로 올라가! 퍼시, 뛰어야 해. 저기 큰 나무 보이지?” “뭐?” 다시 한 번 번개가 쳤다. 지붕에 뚫린 연기 나는 구멍 너머로 엄마가 말한 나무 가 보였다. 제일 가까운 언덕 꼭대기에 거대한, 백악관 크리스마스트리만 한 소 나무가 서 있었다. “저게 경계선이야. 저 언덕을 넘으면 계곡 아래에 있는 큰 농가가 보일 거야. 돌아보지 말고 뛰어. 도와 달라고 소리쳐. 문에 다다를 때까지 멈추지 마.” “엄마도 같이 가.” 엄마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빛은 바다를 볼 때만큼 슬펐다. “안 돼! 엄마도 같이 가. 그로버 옮기는 것 좀 도와 줘.” “먹자!” 그로버는 아까보다 조금 크게 중얼거렸다. 머리 위에 담요를 뒤집어쓴 남자는 으르렁거리고 킁킁거리면서 계속 우리 쪽 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더 가까워지자 나는 그 자가 머리 위에 담요를 쓰고 있 을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고 퉁퉁한 양 손이 몸 옆에서 흔들거리고 있 었다. 담요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머리라고 보기엔 너무 큰 굵고 북슬북 슬한 것이 그 자의 머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뿔처럼 보이는 뾰족한 것 은……. 엄마가 말했다. “저 놈이 원하는 건 우리가 아니야, 너지. 그리고 난 경계선을 넘을 수 없어.” “하지만…….” “시간이 없어, 퍼시. 어서 가렴. 제발.” 순간 나는 미친 듯이 화가 났다. 엄마에게도, 염소인 그로버에게도 , 황소처럼 느리고 신중한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뿔 달린 것에게도. 나는 그로버를 타고 넘어가 쏟아지는 빗속으로 문을 밀어젖혔다.
“같이 가는 거야. 어서, 엄마.” “말했잖니.” “엄마! 난 엄마 없인 안 가. 그로버 옮기는 것 좀 도와 줘.”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밖으로 기어 나가서 그로버를 차에서 끌어냈다.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지만, 그래도 엄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리 멀리 끌고 가 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양쪽에서 그로버를 부축하고 비틀거리면서 허리까지 오는 젖은 풀숲 을 헤치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자 처음으로 괴물이 제대로 보였다. 키는 2 미터가 훌쩍 넘었고, 팔 다리는 『근육맨』 잡지 표지에서 튀어나온 듯 핏줄이 퍼진 살갗 아래에 야구공 을 채워 넣은 것 같은 이두박근 삼두박근으로 울퉁불퉁했다 . 옷이라고는 속옷, 그러니까 상반신이 그렇게 무섭지만 않았어도 우스워 보였을 눈부시게 하얀 면 반바지밖에 입지 않았다. 배꼽 부근에서 시작된 시커먼 털은 어깨로 올라갈 수록 빽빽해졌다. 목은 어마어마한 머리통까지 이어지는 근육과 털 덩어리였다. 내 팔만큼 긴 코, 반짝이는 놋쇠 고리가 달린 지저분한 콧구멍, 잔인한 검은 눈, 그리고 뿔……. 전기 숫돌에 갈아도 그렇게 날카로울 수 없을 만큼 뾰족한 흑백의 거 대한 뿔. 나는 그 괴물을 바로 알아보았다. 브루너 선생님이 처음에 해 준 이야기들 가 운데 나왔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존재할 리가 없었다. 나는 눈을 깜박여 빗물을 털어 냈다. “저거…….” 엄마가 말했다. “파시파에의 아들이야. 저들이 얼마나 널 죽이고 싶어 하는지 알았어야 했는 데.” “하지만 저거 미노…….” “이름은 말하지 마. 이름에는 힘이 있단다.” 소나무는 아직도 너무 멀리 있었다. 오르막길로 최소한 90 미터는 더 가야 했 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황소 인간은 우리 차 위로 몸을 구부리고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우리가 겨우 15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왜 그런 짓 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먹어?” 그로버가 신음하자 나는 말했다. “쉿. 엄마, 왜 저러는 거야? 우리가 안 보이나?” “시각과 청각이 끔찍하게 안 좋거든. 냄새로 판단을 하지. 하지만 곧 우리가 어 디 있는지 알아챌 거야.”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황소 인간이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그는 찢어진 지붕으로 손을 넣어 가브의 카마로를 들어 올렸다. 차가 삐걱거렸다. 그는 차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서 길에 집어던졌다. 젖은 아스팔트에 떨어진 자동차는 불 똥을 튀기며 800 미터 가까이 미끄러지다가 멈췄다. 연료통이 폭발했다. 나는 어디 긁히기만 해 보라던 가브의 말을 떠올렸다. 저런. 엄마가 말했다. “퍼시, 놈이 우리를 보면 돌진할 거야.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바로 옆으 로 뛰어. 저 녀석은 돌진하는 동안 방향을 잘 바꾸지 못한단다. 알아들었니?”
“대체 이런 걸 다 어떻게 아는 거야?” “오랫동안 습격에 대해 걱정해 왔으니까.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야 했어. 널 가까이 두는 게 아니었는데.” “날 가까이 뒀다고? 하지만…….” 황소 인간은 다시 한 번 분노의 고함을 지르더니 쾅쾅거리며 언덕을 오르기 시 작했다. 우리 냄새를 맡은 것이다. 소나무까지는 몇 미터 안 남았지만, 언덕은 점점 가파르고 미끄러워졌다 . 게다 가 그로버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황소 인간이 접근해 왔다. 몇 초만 지나면 우리를 덮칠 것이다. 엄마는 분명 탈진했을 텐데도 그로버를 걸머지며 말했다. “가, 퍼시! 갈라져! 내가 한 말을 기억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 말이 옳다고 느꼈다. 기회는 이것뿐이었다 . 왼쪽으로 달리다가 고개를 돌리니 황소 인간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 다. 검은 눈이 증오로 번쩍였다. 썩은 고기 냄새가 났다. 놈은 머리를 숙이고, 면도날 같은 뿔을 내 가슴 쪽으로 겨누고 돌진했다. 두려움 때문에 뛰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소용없을 터였다. 달리기로는 절대 상 대를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서 있다가 마지 막 순간에 옆으로 뛰었다. 황소 인간은 화물차처럼 돌진해서 내 옆을 지나친 다음 좌절의 고함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로버를 풀밭 위에 눕히고 있는 엄마 쪽을 향했다. 우리는 이미 언덕 꼭대기에 다다라 있었다. 언덕 너머에 엄마가 말한 그대로 계곡이 보였고, 농가 불빛이 빗줄기 속에서 노란색으로 빛났다. 그러나 농가는 8 백 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절대 그곳까지 가지 못할 것이다. 황소 인간은 으르렁거리며 발을 굴렀다. 놈은 계속 엄마에게 눈을 고정시키고 있었고, 엄마는 그 괴물을 그로버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서서히 언덕 아래, 길 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엄마가 외쳤다. “뛰어, 퍼시! 난 더 이상 못 가. 뛰어!” 나는 놈이 엄마에게 돌진하는 동안 두려움에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 다. 엄마는 내게 가르쳐 준 대로 옆으로 비키려 했지만, 괴물은 그 사이 교훈을 얻었다. 엄마가 달아나려고 하자 놈은 번개같이 손을 뻗어 엄마의 목을 잡았다. 놈의 손에 들어 올려진 엄마는 허공을 차고 때리면서 발버둥을 쳤다. “엄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엄마는 가까스로 마지막 말을 짜냈다. “가!” 괴물은 성난 고함을 지르며 엄마의 목을 잡은 주먹을 더욱 조였고, 엄마는 내 눈 앞에서 홀로그램처럼 반짝이는 금색 빛으로 녹아들었다. 눈이 멀 것 같은 빛 이 번쩍 일고 엄마는…… 곧 사라졌다. “안 돼!” 분노가 차올랐다. 팔다리에 새로운 힘이 솟았다. 도즈 선생에게 발톱이 생겼을 때 느낀 것 같은 힘이 분출되었다.
황소 인간은 풀 위에 널브러진 그로버 쪽으로 몸을 숙였다. 놈은 그로버도 들 어 올려서 녹여 버리려고 결심한 듯 몸을 굽히고 내 제일 친한 친구의 냄새를 맡았다.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빨간색 우비를 벗었다. “이봐!” 나는 괴물 옆으로 달려가서 우비를 흔들며 소리쳤다. “어이, 멍청이! 갈아 놓은 소고기!” “우워어어어어어 !” 괴물은 바위 같은 주먹을 흔들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가지 생각이 났다. 어리석은 방법이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커다란 소나무에 등을 대고 마지막 순간에 옆으로 뛸 생각을 하면서 황소 인간 앞에 빨간색 우비를 흔들었다.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황소 인간은 내가 어느 쪽으로 도망치든 붙잡을 태세로 팔을 벌리고 생각보다 더 빠르게 돌진했다. 시간이 더디기만 했다. 다리도 무거워졌다. 옆으로 뛸 수 없었기에 나는 똑바로 뛰어올랐고, 황소 머 리를 걷어차며 그것을 발판 삼아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서 녀석의 목에 내려앉 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걸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0.1 초 뒤에 괴물의 머리 가 나무를 들이받았고, 그 충격에 나까지 이가 흔들렸다. 황소 인간은 비틀거리면서 나를 떼어 내려고 했다. 나는 내던져지지 않으려고 놈의 뿔에 팔을 단단히 감았다. 천둥 번개는 아직도 강하게 내리쳤다. 눈에 빗 물이 들어갔다. 썩은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괴물은 몸을 흔들며 로데오 황소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나무 쪽으로 후진하면 나를 납작하게 뭉개 버릴 수도 있을 텐데, 이 녀석은 기어가 하나밖에 없는 모 양이었다. 오직 앞으로 돌진하는 기어밖에. 그 사이 풀밭에 누운 그로버가 신음하기 시작했다. 나는 입 닥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어서 입을 열었다간 혀를 깨물 것 같았다. “먹자!” 그로버가 신음했다. 황소 인간은 그로버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다시 땅을 구르며 돌진할 준비를 했다. 놈이 어떻게 엄마를 쥐어짜서 빛 속으로 사라지게 했는지를 떠올리자, 강 력한 연료처럼 분노가 불타올랐다. 나는 양손을 한쪽 뿔에 감고 온 힘을 다해 몸을 뒤로 당겼다. 괴물은 몸이 굳어져서는 울부짖더니…… 딱! 놈이 괴성을 지르며 나를 허공에 내던졌다. 나는 등을 바닥으로 향한 채 풀밭 에 떨어졌다. 머리를 바위에 부딪혔다. 일어나 앉자 시야가 뿌옇게 흐렸지만 손 에는 뿔이, 검만 한 크기의 들쭉날쭉한 뼈 무기가 들려 있었다. 괴물이 돌진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한쪽으로 몸을 굴려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괴물이 질주 해 지나가는 순간 나는 부러진 뼈를 놈의 옆구리에, 털투성이 갈빗대 바로 밑에 꽂아 넣었다. 황소 인간은 고통스러운 소리를 질렀다. 놈은 몸부림을 치며 가슴을 긁어 대다 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처럼 금빛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도즈 선생이 터 져 나갔을 때처럼 부서지는 모래가 되어 바람에 날아갔다. 괴물은 사라졌다.
비가 멈춰 있었다. 폭풍은 아직 우르릉거렸지만 소리가 잦아들었다. 몸에서는 가축우리 냄새가 났고 무릎이 떨렸다. 머리 뚜껑이 열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약했고 무서웠으며 슬픔에 떨고 있었다. 조금 전 엄마가 사라지는 것을 보 았다. 나는 누워서 울고 싶었지만, 아직 내 도움이 필요한 그로버가 있었기에 친구를 지고 비틀거리며 계곡 아래로, 농가 불빛을 향해 내려갔다. 울면서 애타 게 엄마를 불렀지만, 그로버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그로버를 포기할 생각은 없 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나무 현관에 쓰러져서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와 노란 불빛 주위를 도는 나방들, 그리고 어디서 본 듯한 턱수염 기른 남자와 공주처럼 금발머리를 말아 올린 예쁜 여자 아이를 본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굳 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고 , 여자 아이가 말했다. “얘예요. 분명히 얘가 그 사람이에요.” 남자가 말했다. “조용히, 아나베스. 아직 의식을 잃지 않았다. 안으로 들여라.” 제 5 장 미스터 D 의 여름캠프 농장 동물이 잔뜩 나오는 기묘한 꿈을 꾸었다. 대부분은 나를 죽이고 싶어 했 다. 나머지는 먹을 것을 원했다. 몇 번인가 깬 것은 분명하지만, 보고 들은 것이 전혀 말이 안 되었기 때문에 나 는 바로 다시 의식을 잃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누군가가 버터 바른 팝콘 맛 푸딩을 숟가락으로 떠먹여 준 것을 기억한다. 금발을 말아 올린 여자 아이가 서 성였고, 숟가락으로 내 턱에 묻은 푸딩을 걷어 내며 웃었다. 그 여자 아이는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하지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겨우 쉰 목소리를 짜냈다. “뭐라고?” 여자 아이는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주위를 살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도둑질당한 물건이 뭐지? 이제 몇 주밖에 안 남았어!” 나는 웅얼거렸다. “미안하지만 난…….”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여자 아이는 잽싸게 내 입에 푸딩을 집어넣었다. 다음에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여자 아이는 없었다. 서핑 선수 같은 건장한 금발 남자가 침실 구석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은 푸른색이었는데…… 뺨이며 이마, 뒤통수에 줄잡아 열 개 정도 달려 있었 다. 마침내 회복이 되었을 때, 이상한 점이라곤 주위 환경이 평소보다 좋다는 것뿐 이었다. 나는 넓은 베란다에 놓인 휴대용 의자에 앉아서 풀밭 너머 멀리 보이는 푸른 언덕을 응시하고 있었다. 산들바람에 딸기향이 실려 왔다. 내 다리 위에는 담요가, 목 뒤에는 베개가 놓여 있었다. 입 안이 전갈의 보금자리로 쓰였던 것 같은 느낌이라는 점만 빼면 모든 것이 훌륭했다. 혀는 마르고 거칠거칠했으며 모든 이가 아팠다. 옆 탁자에는 길쭉한 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녹색 빨대에 마라스키노 체리를 끼운 종이우산이 꽂혀 있는 모양이 꼭 얼음을 넣은 사과 주스처럼 보였다. 손힘이 너무 약해서 감싸 쥔 유리잔을 놓칠 뻔했다. “조심해.”
친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로버가 일주일은 잠을 못 잔 것 같은 모습으로 베란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한쪽 옆구리에는 구두 상자를 안고서 청바지에 ‘반쪽 피 캠프’라고 쓴 밝은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고 캔버스 운동화를 신었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염소 소년이 아니라. 그러니까 어쩌면 악몽을 꾼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엄마는 괜찮은지도 모른다. 우린 아직 휴가 여행 중이고,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여기 이 큰 집에 들르게 됐 고……. 그로버가 말했다. “네가 내 목숨을 구했어. 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언덕 에 돌아가 봤어. 네가 이걸 가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로버는 경건한 태도로 구두 상자를 내 무릎에 올려놓았다. 안에는 아래쪽이 들쭉날쭉하게 잘리고 끄트머리에 피가 말라붙은 흑백의 황 소 뿔이 들어 있었다. 악몽이 아니었다. 나는 말했다. “미노타우로스.” “저기, 퍼시, 그 이름을 그렇게 말하는 건…….” “그리스 신화에서 그렇게 부르는 거 맞지? 미노타우로스. 반은 인간, 반은 황 소.” 그로버는 불안하게 몸의 중심을 옮겼다. “넌 이틀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어. 얼마나 기억이 나?” “우리 엄마, 엄마가 정말로…….” 그로버는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나는 풀밭 저편을 바라보았다. 작은 숲과 구불구불한 개울이 있었고, 푸른 하 늘 아래 딸기 밭이 몇 에이커나 뻗어 나갔다. 계곡은 완만하게 굽이치는 언덕에 둘러싸여 있었고, 우리 바로 앞에 있는 제일 높은 언덕이 바로 꼭대기에 커다란 소나무가 서 있는 그 언덕이었다. 그곳마저도 햇살 아래에서 보니 아름다웠다. 엄마가 죽었다. 온 세상이 캄캄하고 차가워야 마땅했다. 어떤 것도 아름다워 보여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로버가 코를 훌쩍였다. “미안해. 난 실패작이야. 난, 난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티로스야.” 그로버는 신음하면서 발이 떨어져 나가도록 세게 굴렀다. 그러니까, 캔버스 운 동화가 벗겨져 나가도록 말이다. 운동화 안에는 발굽 모양의 구멍만 빼고 스티 로폼이 꽉 차 있었다. “오, 스틱스(저승을 일곱 바퀴 돌아 흐른다는 증오의 강)여!” 그로버가 웅얼거렸다. 맑은 하늘에 천둥이 울렸다. 그로버가 발굽을 가짜 발 속에 집어넣느라 낑낑거리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그 래, 뭐 그건 됐어. 그로버는 사티로스였다. 그로버의 갈색 곱슬머리를 밀어 보면 작은 뿔을 찾아 낼 수 있으리라는 것도 장담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 비참한 나머지 사티로스가 존재한다 해도, 아니 미노타우로스가 존재한다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 건 오직 엄마가 정말로 괴물의 손에 짓눌려 사라졌다는, 금빛 속으로 스러져 버 렸다는 뜻일 뿐이었다.
나는 혼자였다. 고아다. 구린내 가브와 살아야 할까?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것 이다. 우선은 거리에서 살 것이다. 열일곱 살인 척하고 군대에 들어갈 것이다.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로버는 아직도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불쌍한 녀석…… 불쌍한 염소라고 하 든 사티로스라고 하든, 녀석은 얻어맞기라도 했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니, 내 잘못이야. 난 널 보호해야 했어.” “우리 엄마가 날 보호해 달라고 부탁한 거야?” “아니. 그렇지만 그건 내 일이야. 난 지킴이거든. 최소한 과거에는 그랬지.” “하지만 왜…….”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꼈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무리하지 마. 여기.” 그로버는 내가 유리잔을 들어 빨대를 입에 물 수 있게 도와 주었다. 사과 주스를 기대하고 있던 나는 그 맛에 움찔했다. 사과 주스와는 전혀 달랐 다. 초콜릿 칩 쿠키였다. 액체 쿠키. 그것도 그냥 쿠키가 아니라 엄마가 직접 만 든 파란색 버터 바른 초콜릿 칩 쿠키로, 초콜릿 칩이 아직 녹아 내리고 있는 뜨 거운 쿠키였다. 그것을 마시자 온몸이 따스하고 활력이 돌았다. 슬픔이 사라지 지는 않았지만, 지금 막 엄마가 내 뺨을 어루만지며 어렸을 때 늘 하던 대로, 쿠 키를 주면서 모두 잘될 거라고 말한 것만 같았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잔을 다 비워 버리고는 방금 따뜻한 음료를 마셨다고 확신 하며 잔을 들여다보았지만 , 얼음 덩어리는 녹지도 않은 상태였다. “맛있었어?” 그로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맛이었어?” 그로버가 너무나 부러운 목소리로 말해서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 너한테 맛이라도 보여 줬어야 하는 건데.” 그로버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라, 난 그냥 궁금할 뿐이야.” “초콜릿 칩 쿠키 맛이었어. 엄마가 직접 구운.” 그로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기분은 어때?” “낸시 보보핏을 백 미터는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잘됐네. 잘됐어. 그 물건을 더 마시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무슨 뜻이야?” 그로버는 다이너마이트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빈 잔을 받아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가자. 키론과 미스터 D 가 기다리고 계셔.”
베란다는 거의 농가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멀리까지 걸으려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로버가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들겠 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나는 이 기념품 값을 어렵게 치른 만큼 손에서 놓을 생 각은 없었다. 집 반대쪽으로 돌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1.5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반짝이는 물까지 계곡이 쭉 이어지는 것으로 보 아 우리는 롱아일랜드 북쪽
해안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멀리 보이는 물에 다다를 때까지 보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곳에는 완전히 새것처럼 새하얀 대리석 기둥이 햇살 아래 반짝이고 있다는 점 만 빼면 고대 그리스 건축물처럼 보이는 건물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야외 파빌리온(이동 가능한 작은 크기의 건축물), 원형 극장, 원형 경기장 등. 가까운 모래밭에서는 고등학생 또래 아이들과 사티로스 열 명 정도가 배구를 하고 있 었다. 카누들이 작은 호수를 가로질렀다. 숲 속에 자리 잡은 통나무집들 사이로 그로버가 입은 것과 비슷한 밝은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니 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활터에서 과녁에 활을 쏘고 있었다. 또 어떤 아이들 은 말을 타고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내가 헛것을 본 게 아 니라면 그 중에는 날개 달린 말도 있었다. 베란다 끝에서는 두 남자가 카드 탁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나에게 팝콘 맛 푸 딩을 떠먹여 주던 금발 여자 아이가 그 옆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내 쪽을 보고 앉은 남자는 작고 뚱뚱했다. 코는 빨갛고, 커다란 눈은 엷은 색이 었으며, 곱슬머리는 까맣다 못해 자줏빛으로 보였다. 꼭 아기천사 그림 같았다. 뭐라고 하더라, 허빔? 아니다. 케루빔(신학적으로는 지식의 천사를 일컫지만 미술에서는 아기천사 그림을 말한다), 그거다. 남자는 이동 주택에서 중년이 된 아기천사처럼 생겼다. 호랑이 무늬가 들어간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있었는 데, 가브의 포커 모임에 딱 어울릴 것 같았다. 도박에서 내 새아빠를 짓밟을 수 있을 것 같긴 했지만. 그로버가 나에게 중얼거렸다. “저 분이 미스터 D 야. 캠프 책임자셔. 공손히 대해. 저 여자 애는 아나베스 체 이스야. 그냥 캠프 참가자인데 여기에 누구보다도 오래 있었지. 그리고 키론은 이미 알 텐데…….” 그로버는 나에게 등을 보이고 앉은 남자를 가리켰다. 우선 나는 그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다음에는 트위드 재킷을 알아보았고, 숱이 얼마 없는 갈색 머리와 텁수룩한 턱수염도 보 였다. “브루너 선생님!” 나는 소리를 질렀다. 라틴어 교사는 돌아서서 내게 웃음을 지었다. 그 눈에는 가끔 수업 시간에 예 고 없는 시험을 치르고 답을 여러 개 선택한 아이들 모두에게 B 학점을 줄 때 짓 던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아, 잘됐구나, 퍼시. 이제 넷이서 피노클레(2~4 명이 하는 카드 게임)를 할 수 있겠어.” 그는 내게 미스터 D 의 오른쪽 자리를 권했고, 미스터 D 는 핏발 선 눈으로 나 를 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내가 한마디 하긴 해야겠지. 반쪽 피 캠프에 잘 왔다. 널 봐서 내가 기뻐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라.” “어, 고맙습니다.” 나는 그와의 거리를 넓히며 말했다. 가브와 같이 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어른이 행복 음료에 만취했을 때 어떻게 말해야 하냐는 거다. 미스터 D 가 알코 올을 모른다면, 나는 사티로스이다 ! “아나베스?” 브루너 선생님은 금발 여자 아이를 불러, 우리를 소개시켰다.
“이 어린 숙녀가 네가 회복할 때까지 돌보아 줬다, 퍼시. 아나베스야, 퍼시의 침대를 확인해 주겠니? 일단은 11
번 숙소에 배정할 거야.”
아나베스가 말했다. “얼마든지요, 키론.” 아나베스는 내 나이 또래에, 나보다 몇 센티미터는 큰 것 같았고, 훨씬 강한 외 모를 지녔다. 짙게 탄 피부와 굽슬굽슬한 금발만 보자면 내가 상상하는 전형적 인 캘리포니아 여성의 모습에 들어맞았지만, 눈이 그런 인상을 망쳤다. 비구름 같이 위협적인 회색 눈이었다. 예쁘긴 했지만 싸움에서 나를 때려눕힐 최적의 방법을 분석 중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나베스는 내 손에 들린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흘끗 보더니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애가 ‘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였구나!’라든가 ‘와, 대단해!’라든가 뭐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 대신 그 애는 이렇게 말했다. “너 잘 때 침 흘리더라.” 그러더니 아나베스는 금빛 머리카락을 뒤로 흩날리며 잔디밭을 달려 내려갔 다. 나는 화제를 바꾸고 싶은 마음에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어, 여기서 일하시는 건가요, 브루너 선생님?” “브루너 선생님이 아니다.” “전…….” 브루너 선생님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가짜 이름이란다. 키론이라고 부르면 될 게다.” “알았어요.” 나는 혼란스러워져서 책임자를 보았다. “그럼 미스터 D…… 라는 건 무슨 이름의 약자인가요?” 미스터 D 는 카드를 섞던 손을 멈추고 내가 방금 큰 소리로 트림이라도 한 듯 이 쳐다보았다. “애송아, 이름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단다. 아무 이유 없이 이름을 쓰면서 돌 아다니지 않는 법이다.”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브루너…… 아니 키론이 끼어들었다. “퍼시,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 기쁘구나. 내가 캠프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는 아 이를 직접 방문한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다. 시간 낭비였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접 방문하셨다니요?” “너를 가르치러 얀시 아카데미에 갔던 것 말이다. 물론 우리는 대부분 학교에 사티로스를 보내어 망을 보게 한다. 그런데 그로버는 널 만나자마자 나에게 경 보를 울렸지. 그로버는 네게서 뭔가 특별한 면을 감지했고, 내가 직접 가 보기 로 했단다. 다른 라틴어 교사를 설득해서…… 떠나게 했지.” 학년 초를 기억해 내려고 해 보았다. 너무 오래전 일 같았지만, 얀시에서의 첫 주에는 다른 라틴어 교사가 있었다는 것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러더니 아무 설명도 없이 그 교사가 사라지고 브루너 선생님이 수업을 맡았다. “오로지 절 가르치러 얀시에 오셨다고요?” 키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너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우리는 네 어머니에게 접촉해서 네가 반쪽 피 캠프에 올 준비가 될 경우를 대비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 지. 그렇지만 넌 아직 배울 것이 너무나 많았어. 그럼에도 여기까지 살아서 왔 고. 그게 언제나 첫 번째 시험이란다.” 미스터 D 가 조급하게 말했다. “그로버! 게임을 할 거냐, 말 거냐?” “합니다!” 그로버는 덜덜 떨면서 네 번째 의자에 앉았는데 나로서는 왜 그로버가 호랑이 무늬의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작고 통통한 남자를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피노클레 하는 법은 알고 있겠지?” 미스터 D 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모르는데요.” “‘죄송하지만 모릅니다.’ 라고 해야지.” “모릅니다.” 캠프 책임자가 점점 싫어졌다. “흠, 피노클레는 검투 대결과 팩맨(고전 비디오게임)과 더불어 인간이 발명한 가장 훌륭한 게임이지. 교양 있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규칙을 알 텐데.” “배울 수 있을 겁니다.” 키론이 말했다. 나는 물었다. “도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이죠?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브루……, 아 니 키론. 왜 나를 가르치러 얀시 아카데미에 왔었죠?” 미스터 D 가 콧방귀를 뀌었다. “나도 똑같이 물었지.” 그리고 캠프 책임자는 카드를 돌렸다. 그로버는 앞에 카드가 한 장 놓일 때마 다 움찔거렸다. 키론은 라틴어 수업 시간에 마치 내 평균 점수가 얼마든 상관없이 그에게는 내 가 스타 학생임을 알려 주려는 듯 지었던 미소를 보냈다. 그는 내가 정확한 답 을 알고 있기를 기대했다. “퍼시, 어머니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니?” “엄마는…….” 나는 바다를 보던 엄마의 슬픈 눈을 떠올렸다. “엄마는 아빠가 원했더라도 나를 여기에 보내는 게 두렵다고 했어요. 일단 여 기에 오면 떠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요. 날 곁에 두고 싶어 했어요.” 미스터 D 가 말했다. “전형적이구먼. 대개 그런 식으로 살해당하지. 애송이, 비딩을 할 건가 말 건 가?” “뭐라고요?” 그는 조바심을 내며 피노클레에서 어떻게 비딩을 하는지 설명했고, 나는 그대 로 했다. 키론이 말했다. “이야기할 것이 너무 많구나. 오리엔테이션 필름만으로는 충분치 않겠어.”
“오리엔테이션 필름이라고요?” 키론이 결정을 내렸다. “아니다, 흠. 퍼시, 넌 네 친구 그로버가 사티로스라는 걸 알고 있지. 네 가…….” 그는 구두 상자에 든 뿔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였다는 것도 알 거고. 둘 다 작은 진전이 아니야. 아마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은 네 인생에 거대한 힘들이 작용한다는 점일 게다. 신들, 네가 그리스 신이라고 부르는 힘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단다.” 나는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을 빤히 보았다. 누군가 ‘말도 안 돼!’라고 외치길 기다렸지만 그 대신 나온 것은 미스터 D 의 고함 소리뿐이었다 . “오, 왕과 왕비야. 트릭! 트릭!” 그는 점수를 계산하면서 낄낄거렸다. 그로버가 머뭇머뭇 물었다. “미스터 D, 안 드실 거면 그 다이어트 콜라 좀 먹어도 될까요?” “응? 아, 물론이지.” 그로버는 빈 알루미늄 캔 한쪽을 덥석 뜯어서 입 안 가득 씹었다. 나는 키론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신이 있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글쎄, 일단 유일신으로서의 신은 전혀 다른 문제지.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다 루지 말자.” “형이상학적이라고요 ? 하지만 방금 말씀은…….” “아, 복수형으로서의 신들, 그러니까 자연의 힘과 인간의 노력을 통제하는 위 대한 존재들 말이다. 올림포스의 불사신들이라면 훨씬 작은 문제지.” “작다고요?” “그래. 우리가 라틴어 수업 시간에 논의했던 신들 말이다.” “제우스, 헤라, 아폴로, 그런 신 말씀이시죠?” 다시 한 번 같은 일이 벌어졌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에 멀리서 천둥이 친 것이 다. 미스터 D 가 말했다. “애송아, 내가 너라면 그 이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진 않을 거다.” “하지만 이야기일 뿐이잖아요. 그건 신화라고요. 번개와 계절 같은 것들을 설 명하기 위한 신화. 과학이 있기 전에 사람들이 믿던 거잖아요.” “과학이라!” 미스터 D 가 비웃었다. “그렇다면 말해 봐라, 페르세우스 잭슨.” 나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내 본명이 나오자 움찔했다. “2 천 년이 지나면 네 그 과학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흠? 원시적인 헛소리라고 하겠지. 그런 거야. 아, 난 유한한 자들을 사랑해. 도무지 진보라는 걸 모르거든. 자기들이 아주 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과연 그런가, 키론? 이 아이를 보고 말해 보게나.”
미스터 D 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유한한 자’라고 부르는 말투에 는 마치 자기는 아니라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로버가 어째 서 그렇게 충직하게 카드에 신경을 쓰고 음료수 캔을 씹으면서 입을 다물고 있 는지 추측하고 조용히 있기에 충분했다. 키론이 말했다. “퍼시, 네가 믿든 믿지 않든 불사신은 정말 죽지 않는 존재를 의미한단다. 잠시 상상해 보겠니?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그 대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꽤 좋을 것 같다고 말할 뻔했지만, 키론의 말투에는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말이죠?” “바로 그렇다. 네가 신이라면 신화에 불과하다고, 번개를 설명하기 위한 옛날 이야기일 뿐이라고 불리는 기분이 어떨까? 페르세우스 잭슨. 언젠가는 사람들 이 너를 신화라고 부르고, 어린 소년이 어머니를 잃은 충격을 어떻게 극복하는 지 설명하기 위해 창조된 이야기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째서인지 그는 내가 화를 내도록 만들고 있었지만, 나는 뜻대로 할 마음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겠죠. 하지만 신들이 있다는 건 안 믿어요.” 미스터 D 가 중얼거렸다. “믿는 게 좋을걸. 신들 중 하나가 널 태워 버리기 전에.” 그로버가 말했다. “제, 제발요. 퍼시는 어머니를 잃은 지 얼마 안 됐어요. 충격을 받은 상태에요.” “그것 또한 행운이지.” 미스터 D 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믿지도 않는 애들을 훈련시키는 이런 비참한 일에 처박힌 나야말로 지독한 상황이야!” 그가 손을 내젓자, 순간적으로 햇빛이 구부러졌다가 공기로 유리잔을 빚어낸 것처럼 탁자 위에 굽 달린 잔이 하나 나타났다. 잔에는 붉은 포도주가 가득했 다. 나는 입을 딱 벌렸지만, 키론은 눈도 거의 들지 않고 경고하듯 말했다. “미스터 D, 제한된 일이라는 것을 잊으셨습니다 .” 미스터 D 는 포도주를 보더니 놀란 척하며 하늘에 대고 외쳤다. “이런, 이런. 오랜 습관이라서 그래요! 미안하다고요!” 천둥이 또 울렸다. 미스터 D 는 다시 손을 내저었고, 포도주 잔은 다이어트 콜라 캔으로 변했다. 그는 비참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캔 뚜껑을 딴 다음 카드 게임에 몰두했다. 키론이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 “미스터 D 는 전에 아버님을 거역하고 금지된 나무 정령(드라이어드라고 불린 다)을 좋아했거든.” 나는 우주 공간에서 떨어진 물건처럼 다이어트 콜라 캔을 노려보며 그 말을 되 뇌었다. “나무 정령.” 미스터 D 가 인정하고 나섰다. “그래. 아버지는 날 벌하는 일을 즐긴단 말이지. 처음에는 금지령이었지 . 끔찍 해! 정말이지 끔찍한 십 년이었어! 두 번째에는…… 뭐, 그 여자는 정말 예뻤고
난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거든. 두 번째는 이리로 보내셨지. 반쪽 피 언덕으 로. 너 같은 망나니들을 위한 여름캠프로 말이야. ‘좋은 선도자가 되도록 해라. 젊은이들을 갈기갈기 찢지 말고 그들과 같이 있어 봐’라시더군. 하! 불공정의 극치야.” 미스터 D 는 삐죽거리는 여섯 살배기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그 아버님이란 분은…….” “불사의 신들이여! 키론, 자네가 기본적인 건 가르쳤을 줄 알았는데? 내 아버 지는 물론, 제우스야.” 나는 그리스 신화 속 D 로 시작하는 이름을 떠올렸다. 포도주, 호랑이 가죽, 그 를 위해 일하는 사티로스들, 미스터 D 가 주인이라도 되는 양 굽실거리는 그로 버의 모습. “디오니소스, 포도주의 신.” 미스터 D 는 눈동자를 굴렸다. “요새는 뭐라고 하지, 그로버? 애들이 ‘잘했쓰!’라고 하던가?” “그, 그렇습니다. 미스터 D.” “그렇다면, 잘했쓰! 퍼시 잭슨. 내가 아프로디테라고 생각했으려나 ?” “당신이 신이란 말이죠?” “그렇다.” “신이라고요…… 당신이…….”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보았고, 나는 그 눈에서 자줏빛 불꽃 같은 것을, 이 작고 통통한 투덜이가 나에게 진짜 본성을 아주 조금만 보여 주고 있을 뿐이 라는 암시를 보았다. 나는 믿지 않는 자들을 목 졸라 죽이는 포도덩굴을, 전투 욕에 미친 술 취한 전사들을, 손이 지느러미로 변하고 얼굴이 길어져서 돌고래 코로 변하는 와중에 비명을 지르는 선원들을 보았다. 내가 더 밀고 나간다면 미 스터 D 는 더 지독한 것들을 보여 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 뇌리에, 남은 평생 죄수복을 입고 고무로 만든 방에서 살아야 할 병을 심어 줄 것이다. “날 시험하고 싶나, 애송이?”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뇨. 아, 아닙니다.” 불꽃이 약간 가라앉았다. 그는 카드 게임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군요, 미스터 D.” 키론이 말하면서 스트레이트를 내려놓고 점수를 계산했다. “제가 이겼습니다.” 나는 미스터 D 가 휠체어에 앉은 키론을 바로 소멸시켜 버릴 줄 알았지만, 그 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코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미스터 D 가 일어서자 그로 버도 따라 일어섰다. 미스터 D 가 말했다. “피곤하군. 오늘 밤 노래 모임에 가기 전에 낮잠을 좀 자야겠어. 하지만 우선 그로버, 완벽하지 못한 이번 네 임무 수행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해야겠 다.” 그로버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옙.” 미스터 D 는 나를 돌아보았다.
“11 번 숙소다, 퍼시 잭슨. 그리고 예의를 잊지 말도록.” 어슬렁어슬렁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미스터 D 의 뒤를 그로버가 비참한 얼굴 로 따라갔다. “그로버는 괜찮을까요?” 내 질문에 키론은 약간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디오니소스는 정말로 미친 건 아니란다. 그저 지금 맡은 일을 싫어할 뿐이야. 그는…… 뭐랄까, 외출 금지를 당한 셈이고 올림포스에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 이 떨어질 때까지 또 한 세기를 버틸 수는 없거든.” “올림포스 산, 정말로 올림포스 산에 신들의 전당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글쎄, 일단 그리스에 올림포스 산이 있지. 그리고 신들의 집이자 그 힘들의 집 합으로서 실제로 올림포스 산 위에 그런 장소가 있고. 지금도 과거를 예우하는 뜻에서 올림포스 산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 전당은 이동한단다, 퍼시. 신들 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들이 여기 있다는 얘긴가요? 그러니까 미국에요?” “물론이지. 신들은 서구의 심장부와 더불어 이동하거든.” “뭐라고요?” “잘 봐라, 퍼시. ‘서구 문명’이 그저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 그건 살아 있는 힘이다. 수천 년 동안 밝게 타올랐던 집합 의식이지. 신들은 그 일부이고, 신들이 그 원천이라고. 혹은 적어도 워낙 거기에 강하게 묶여 있어서 서구 문명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 한 사라질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 불길은 그리스에서 시작됐어. 그 후에는 알다시피…… 내 수업을 들은 이상 잘 알 거라 생각하네만, 그 불길의 심장부가 로마로 옮겨 갔고, 신들도 이동했지. 이름은 달라졌을지도 몰라. 제우스 대신 주피터, 아프로디테 대신 비너스 등등. 하지만 같은 힘, 같은 신들이었지.” “그 후에는 죽었잖아요.” “죽어? 천만에. 서구가 죽었나? 신들은 그저 독일로, 프랑스로, 스페인으로 한 동안 옮겨 갔을 뿐이다. 불길이 가장 밝은 곳이라면 어디에나 신들이 있었지. 몇 세기 동안은 영국에 있기도 했어. 건축물만 보면 알 수 있단다. 사람들은 신 들을 잊지 않아. 지난 3 천 년간 신들이 지배하는 곳 어디에서나 그림이며, 조각 이며, 가장 중요한 건물들에서 신들을 볼 수 있었지. 그래, 퍼시. 당연하게도 그 들은 지금 네 고향에 있단다. 미국의 상징을 보아라. 제우스의 독수리지. 록펠 러 센터에 있는 프로메테우스 동상, 워싱턴 정부 건물들의 그리스식 파사드(건 축물의 주된 출입구 부분)도 그렇지. 올림포스 신들을 여기저기 그려 넣지 않 은 미국 도시를 하나라도 찾아낼 수 있을까? 좋든 싫든, 그리고 단언하는데 로 마도 많은 사람이 싫어했지…… . 미국은 지금 그 불길의 심장부야. 서구의 큰 나라지. 따라서 올림포스도 여기 있단다. 우리도 여기에 있고.” 너무 심했다. 특히나 내가 무슨 클럽에라도 가입한 것처럼 키론이 말하는 ‘우 리’라는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정말 너무 과했다. “정체가 뭐예요, 키론? 그리고 나는…… 나는 누구죠?” 키론은 미소 지었다. 그는 휠체어에서 일어날 것처럼 무게 중심을 옮겼지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허리 아래가 마비 상태다. 키론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네가 누구냐? 흠, 그건 우리 모두 묻고 싶은 질문 아닐까? 하지만 우선은 널 11 번 숙소에 배정해야겠다 .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내일은 배울 시간이 많을 거고. 게다가 오늘 밤 캠프파이어에는 스모어(구운 마시멜로와 초 콜릿 판을 과자 사이에 끼운 음식)가 나올 게다. 난 초콜릿을 아주 좋아한단 다.”
그러더니 키론은 정말로 휠체어에서 일어섰다. 다만 일어선 방식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다리에서 담요가 떨어졌지만 다리가 움직이지는 않았다. 허리띠 위쪽으로 허리가 점점 길어졌다. 처음에 나는 키론이 아주 긴 하얀색 벨벳 속옷 을 입었나 보다고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의자 위로 솟아 올라와 여느 사람보다 더 커지자 그 벨벳 속옷이 실제로는 속옷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거 친 흰 털 아래 근육과 힘줄이 보이는 동물의 앞가슴이었다 . 휠체어는 의자가 아 니었다. 거대한 상자에 바퀴가 달린 일종의 컨테이너였고, 그 안에 도저히 키론 이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마법 컨테이너가 분명했다. 무릎이 불거지더니 반 짝거리는 커다란 발굽이 달린 긴 다리 하나가 불쑥 나왔다. 그 다음 앞발이 하 나 더 나오고, 차례로 뒷다리가 둘 나오고 나니 상자 안에는 가짜 인간 다리가 붙어 있던 금속 뼈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막 휠체어에서 뛰쳐나온 말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흰색 준마였다. 그러나 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내 라틴어 교사의 상체가 말의 몸체에 부드럽게 이어 져 있었다. 켄타우로스가 말했다. “이제 좀 살겠군. 저 안에 너무 오래 갇혀 있어서 거모(발굽 위 뒤쪽에 난 텁수 룩한 털)가 다 누웠구나. 그럼 가자, 퍼시 잭슨. 다른 캠프 참가자들을 만나 봐 야지.” 제 6 장 화장실 사건 일단 라틴어 교사가 말이라는 사실을 극복한 뒤, 우리는 즐겁게 순회 관람을 했다. 그래도 키론 뒤에서 걷지 않으려고 조심하기는 했다. 나는 메이시의 추수 감사절 퍼레이드(메이시 백화점 주최로 추수감사절에 맨해튼 도심에서 벌어지 는 유명한 퍼레이드)에서 몇 번이나 뒤치다꺼리를 했는데, 미안하지만 키론의 뒷모습을 앞모습만큼 믿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배구장을 지나갔다. 캠프 참가자 몇 명이 서로를 팔꿈치로 찔렀다. 한 명이 내가 들고 있는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가리키자 다른 아이가 말했다. “바로 저 아이야.” 대부분의 캠프 참가자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들의 사티로스 친구들은 그로버보다 몸집이 컸고, 벌거벗은 털투성이 아랫도리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오렌지색 ‘반쪽 피 캠프’ 티셔츠만 입고서 다가닥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타는 편이 아닌데도 그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 내가 공 중제비를 돌기라도 기대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농가를 돌아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고급 해변 리조트처럼 가장자리 를 흰색으로 장식한 4 층짜리 하늘색 건물이었다. 꼭대기에 달린 독수리 풍향계 를 보고 있는데 무언가 눈길을 끌었다. 박공지붕(지붕면이 양쪽으로 경사진 삼 각형 모양의 지붕) 밑 다락방 창문에 그림자가 보였다. 무엇인가가 순간적으로 커튼을 움직였고, 나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 위는 뭐죠?” 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더니 키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냥 다락방이란다 .” “누가 사나요?” “아니.” 키론은 단호하게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나는 키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무엇인가가 커튼을 움직였다는 것도 확실했다. “가자, 퍼시. 볼 게 많단다.” 키론의 태평한 말투에 지금은 긴장이 살짝 어려 있었다. 우리는 사티로스 하나가 갈대 피리를 연주하는 옆에서 캠프 참가자들이 딸기 를 쓸어 담고 있는 밭을 걸어서 통과했다. 키론은 뉴욕 레스토랑과 올림포스 산에 수출하기 위해 캠프에서 농사를 짓는 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버는 거지. 그리고 딸기 농사는 거의 힘이 들지 않거든.” 그는 미스터 D 가 과일나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스터 D 가 주 위에 있으면 나무들이 미친 듯이 흥분한다는 것이다. 그의 영향력은 포도덩굴 에 제일 잘 통하지만, 미스터 D 가 포도를 가까이하는 걸 금지당했기 때문에 대 신 딸기를 키운다고 했다. 나는 피리를 부는 사티로스를 관찰했다. 그의 음악은 불난 집에서 달아나는 피 난자들처럼 벌레들을 딸기 밭에서 흩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로버도 음악으 로 저런 마법을 부릴 수 있는지 궁금했다. 또, 아직 저택 안에서 미스터 D 에게 야단맞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나는 키론에게 물었다. “그로버가 그렇게 많이 곤란해지는 건 아니죠? 그로버는 좋은 보호자였어요 . 정말로요.” 키론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트위드 재킷을 벗어서 안장처럼 말 등에 걸쳐 놓 았다. “그로버에겐 큰 꿈이 있단다, 퍼시. 무리일 만큼 큰 꿈인지도 몰라. 그걸 이루 기 위해서는 우선 지킴이로서 새로운 캠프 참가자를 찾아 안전하게 이곳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해서 용기를 증명해 보였어야 했다.” “그렇게 했잖아요!” “나라면 그 말에 동의하겠다만, 판단은 내 몫이 아니란다. 디오니소스와 ‘갈라 진 발굽의 장로회’가 결정할 거야. 그들이 이번 임무를 성공으로 볼 것 같지 않 구나. 어쨌든 그로버는 뉴욕에서 너를 놓쳤어. 그 다음엔 네 어머니의 불행한 운명이 있었고. 그리고 네가 경계선까지 끌고 왔을 때 그로버가 의식 불명이었 다는 점도 있지. 장로회는 이 일이 그로버의 용기를 증명했는지 의문을 제기할 거다.” 나는 항의하고 싶었다. 일어난 일 중 어느 것도 그로버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버스 정류장에서 따돌리지만 않았어도 그로버 가 이런 곤란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순 있겠죠?” 키론은 얼굴을 찡그렸다. “유감이지만 이번이 두 번째 기회였단다, 퍼시. 5 년 전 첫 임무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장로회는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을 꺼렸지. 올림포스도 아는 바지만, 나는 다시 시도하기 전에 더 기다리라고 충고했었다. 그로버는 아직도 나이에 비해 너무 몸집이 작고…….” “몇 살인데요?” “스물여덟 살.” “뭐라고요? 그런데도 6 학년이었단 말이에요?” “사티로스는 인간의 절반 정도 속도로 성숙한단다. 그로버는 지난 육 년 동안 중학생이었던 셈이지.”
“끔찍하군요.” 키론도 동감을 표시했다. “꽤 그렇지. 좌우간 그로버는 사티로스 기준으로 보아도 발육이 늦된 편이고, 아직 숲의 마법에도 통달하지 못했어. 가엾게도 꿈을 좇는 데 너무 조급했어. 어쩌면 이제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도…….” “그건 불공평해요. 처음에 무슨 일이 있었죠? 정말로 그렇게까지 나빴어요?” 키론은 재빨리 눈을 피했다. “이제 계속 가 볼까?” 그러나 나는 화제를 돌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키론이 ‘죽음’이라는 표현 을 피하려는 듯 어머니의 ‘운명’이라고 말했을 때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머릿 속에 어떤 생각이, 작지만 희망적인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키론, 만일 신도 올림포스도 모두 진짜라면…….” “그렇다면?” “지하 세계도 진짜라는 건가요?” 키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단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는 것처럼 머뭇거렸다. “죽은 뒤 영혼들이 가는 곳이 있지. 하지만 우선은, 더 알기 전까지 그런 생각 은 머릿속에서 몰아냈으면 좋겠구나.” “더 알기 전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자, 퍼시. 숲을 보러 가자.” 가까이 가 보니 숲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갔다. 최소한 계곡 면적의 4 분의 1 은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나무들도 어찌나 크고 울창한지 아메리카 원주민들 이 후로 들어가 본 사람이 없을 것만 같았다. 키론이 말했다. “숲에는 놈들을 풀어놓았으니 운을 시험해 보고 싶거든 무장을 하고 가도록 해라.” “놈들이 누구인데요? 무슨 무장을 해요?” “알게 될 게다. 깃발 잡기가 금요일 밤이니까. 사이즈 5 면 되겠지. 무기 창고에 는 나중에 내가 가 보마.” 여름캠프에 무슨 무기 창고가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 외에도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순회 여행을 계속 따르기로 했다. 우리는 활터, 카누 젓기 호수, 키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마구간, 투창 연습장, 노래 모임용 야 외 극장에, 그리고 창칼 싸움에 이용한다는 야외 경기장까지 둘러보았다. “창칼 싸움이라고요 ?” “숙소끼리의 시합과, 뭐 그런 것들이지. 죽는 사람은 없다. 보통은…… 아, 그 렇지. 그리고 식당이 있구나.” 키론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하얀 그리스풍 기둥으로 외벽을 장식 한 야외 파빌리온을 가리켰다. 돌로 만든 야외 식탁이 열두 개 놓여 있었다. 지 붕도 벽도 없었다. “비가 오면 어떻게 해요?” 내 물음에 키론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래도 먹긴 해야 할 것 아닌가요?” 결국 나는 그 주제를 포기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통나무집이 나왔다. 총 열두 채로, 호수 옆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었 다. 두 채가 나란히, 각각 다섯 채씩 양쪽으로 열을 지어 U 자를 이뤘다. 단언하 건대 내가 이제까지 본 중에 제일 괴상한 건물들의 집합이었다. 문 위에 홀수는 왼쪽, 짝수는 오른쪽으로 커다란 놋쇠 숫자판이 달려 있다는 것을 빼고는 전혀 비슷한 구석이 없는 집들이었다. 9 번은 작은 공장처럼 굴뚝 투성이였다. 4 번은 벽에 토마토 덩굴이 붙어 있었고, 지붕은 진짜 풀이었다. 7 번은 순금으로 만든 듯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햇살에 번쩍거렸다. 이 집들은 그 리스 조각상과 분수대, 꽃밭, 내 취미에 좀 더 맞는 몇 개의 농구대가 흩어져 있 는 축구 경기장만 한 공동 구역을 마주하고 빙 둘러 있었다. 공동 구역 중앙에는 돌로 가장자리를 두른 커다란 불구덩이가 있었다. 따뜻한 오후인데도 연기가 피어올랐고, 아홉 살쯤 된 여자 아이가 막대기로 석탄을 쑤 시며 불을 살피고 있었다. 맨 끝에 있는 두 채, 1 번과 2 번 건물은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시는 사당처럼 정면 에 육중한 기둥이 늘어선 커다란 흰색 대리석 건물이었다. 1 번이 열두 채 중에 가장 컸다. 광택이 도는 청동 문은 홀로그램처럼 반짝여서 다른 각도에서 보면 번갯불이 문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2 번은 1 번보다 우아했는데, 더 가느 다란 기둥에 석류와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공작이 새겨져 있었다. “제우스와 헤라?” 내 추측에 키론이 대답했다. “정확해.” “비어 있는 것 같네요.” “빈 숙소가 몇 채 있지. 맞는 말이야. 1 번과 2 번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단다.” 좋다. 그러니까 각 숙소는 마스코트처럼 각기 다른 신을 상징으로 삼고 있었 다. 올림포스의 열두 신들에 맞춘 열두 개의 통나무집. 하지만 왜 빈 집이 있을 까? 나는 왼쪽 첫 번째, 그러니까 3 번 앞에 멈춰 섰다. 1
번만큼 높고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낮고 길고 견고했다. 외벽은 울퉁불퉁한 회색 돌이었는데, 바다
밑바닥에서 잘라 내어 붙인 것처럼 조개 껍질과 산호 조 각이 박혀 있었다. 내가 열린 문 안을 엿보자 키론이 말했다. “나라면 그러지 않겠다!” 키론이 잡아당기기 전에 나는 몬토크 해안에 부는 바람의 소금 냄새 같은 것을 맡았다. 안쪽 벽은 전복 껍질처럼 반짝였다. 실크 침대보가 개켜진 빈 침대가 여섯 개. 그곳은 너무나 슬프고 외로웠기 때문에 키론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자, 퍼시.”라고 하자 마음이 놓였다. 다른 숙소는 대부분 아이들로 북적였다. 5
번은 새빨간 색이었다. 양동이로 붓고 손으로 칠한 것처럼 페인트칠이 너저 분했다. 지붕에는 가시철망을
둘렀다. 문에는 박제한 멧돼지 머리가 달려 있었 는데, 그 눈은 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안에서는 록 음악이 쾅쾅 울리는 가운데 비열하게 생긴 아이들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뒤엉켜 싸우고 말다툼을 하고 있 었다. 목소리가 제일 큰 아이는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였다. 거인 사이즈만 한 반쪽 피 캠프 셔츠 위에 위장 전투복을 입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 니 고약한 미소를 지었다. 낸시 보보핏이 생각나는 녀석이었다. 이쪽이 훨씬 덩
치가 크고 강해 보이는 데다 길고 실 같은 머리카락도 붉은색이 아니라 갈색이 라는 점만 빼면. 나는 키론의 발굽에 거리를 두려고 애쓰면서 계속 걸었다. “다른 켄타우로스는 보이지 않네요.” 내 말에 키론은 슬프게 대답했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내 동족은 거칠고 야만적인 족속이란다. 황야에서나 중 요한 운동 경기에서는 마주칠지도 모르지만, 여기에서는 볼 수 없을 거야.” “이름이 키론이라고 하셨잖아요. 정말로 그…….” 그는 웃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신화 속 바로 그 키론이냐고? 헤라클레스와 다른 영웅들을 훈련시킨? 그렇단 다, 퍼시. 내가 그 키론이야.” “하지만 키론은 죽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키론은 그 질문이 흥미롭다는 듯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죽었어야 하는 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구나. 사실 나는 죽을 수가 없단다. 아 주 오래 전에 신들이 내 소원을 들어주었지. 내가 사랑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 도록. 나는 인간이 나를 필요로 하는 한 영웅들의 교사로 지낼 수 있단다. 그 소 원으로 얻은 것도 많고, 물론 포기한 것도 많아. 하지만 난 아직도 여기에 있고, 그러니 아직은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나는 3 천 년 동안이나 교사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열 가지 소원 중에 꼽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지겨운 적 없었어요?” “아니, 아니. 끔찍하게 우울해질 때는 있다만 지겨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 우울해요?” 키론은 이번에도 귀가 거의 먹은 것처럼 굴었다. “아, 아나베스가 기다리고 있구나.” 큰 집에서 만났던 금발 여자 애가 왼쪽 마지막, 11 번 통나무집 앞에서 책을 읽 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애는 아직도 내가 침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생각하는 것 처럼 곱지 않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 보려고 했지만 제목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또 난독 증인가 생각했다가, 제목이 영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스어로 보 이는 글자였다. 그러니까 그리스 문자 말이다. 책에는 신전과 조각과 건축 서적 에 나오는 것처럼 각기 다른 종류의 기둥 사진들이 있었다. 키론이 말했다. “아나베스, 나는 12 시에 숙련반 궁술 수업이 있단다. 여기부터는 네가 퍼시를 안내해 주겠느냐?” “네, 그럴게요.” “11 번이다.” 키론은 문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편안하게 있도록 해라.” 여름캠프의 모든 숙소 중에서 11 번이 가장 평범하고 낡은 곳처럼 보였다. ‘낡 은’에 강조점을 붙여서 말이다. 문지방은 닳았고, 갈색 페인트는 벗겨져 나갔
다. 현관 위에는 의사들의 상징인, 두 마리 뱀이 휘감고 있는 날개 달린 지팡이 가 있었다. 뭐라고 부르더라? 그래. 카두케우스. 안에는 남녀 아이들이 꽉 차 있었는데, 침대 수보다 훨씬 많았다. 바닥에는 휴 대용 침낭이 가득했다. 마치 적십자가 대피소로 사용하는 체육관처럼 보였다. 키론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 문이 낮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키론을 보자 모두 일어서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면 행운을 빈다, 퍼시. 저녁 식사 때 보자.” 키론은 그렇게 말하고 활터 쪽으로 다가닥거리며 달려갔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있 지 않았다. 고개를 똑바로 하고 나를 재어 보고 있었다. 이런 절차라면 잘 알고 있다. 학교를 몇 번이나 옮겼으니까. 아나베스가 재촉했다. “자, 들어가.”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문 안에서 발을 헛디뎌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었다. 킥킥 거리는 소리가 약간 났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나베스가 말했다. “퍼시 잭슨, 11 번 숙소야.” 누군가가 물었다. “확정이야, 미확정이야?”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지만 아나베스가 대답했다. “미확정.” 모두가 툴툴거렸다. 나머지 아이들보다 약간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 아이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자, 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이잖아. 잘 왔어, 퍼시. 저쪽 바닥에 있는 자리를 쓰 도록 해.” 열아홉 살쯤 되어 보였고, 꽤 멋있었다. 키가 크고 근육질이었으며 짧게 자른 밀짚 색깔 머리에 친근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렌지색 민소매 티셔츠와 무릎 쯤에서 자른 청바지 차림에 샌들을 신고, 각기 다른 오색 구슬이 달린 가죽 목 걸이를 했다. 그의 외모에서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곤 낡은 검에 베인 것처럼 오 른쪽 눈 바로 아래에서 턱까지 이어지는 깊은 흰색 흉터뿐이었다 . “이쪽은 루크야.” 소개하는 아나베스의 목소리가 어쩐지 다르게 들렸다. 흘끔 살펴보니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나베스는 다시 표정이 굳어졌 다. “당분간 네 지도원이 되어 줄 거야.” “당분간?” 내 물음에 루크가 찬찬히 설명했다. “넌 미확정이야. 즉 어느 숙소에 들어가야 할지 몰라서 이리로 온 거지. 11 번 은 신참과 방문자를 모두 받아들이거든 . 당연히 그래야 하고. 우리 후원자인 헤 르메스는 여행자의 신이니까.” 내게 주어진 좁은 바닥을 보았다. 내 자리라고 표시해 놓을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다. 짐도 옷도 침낭도 없었다. 미노타우로스의 뿔밖에는. 나는 그 뿔을 내 려놓을까 생각하다가 헤르메스가 도둑의 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주위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몇몇은 부루퉁하니 의심스러운 표정이었고, 몇몇 은 바보처럼 웃고 있었고, 다른 몇몇은 내 주머니를 털 기회를 노리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여기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하는데?” 루크가 대답했다. “좋은 질문이군. 네가 확정될 때까지야.” “얼마나 걸리는데?” 아이들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아나베스가 말했다. “이리 와. 배구장 보여 줄게.” “배구장은 벌써 봤는데.” “나와.” 아나베스는 내 손목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뒤에서 11 번 숙소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몇 미터 떨어지자 아나베스가 말했다. “잭슨, 그보다는 제대로 행동해야지.” “뭐라고?” 아나베스는 눈동자를 굴리며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니 믿을 수가 없네.” 슬슬 화가 났다. “문제가 뭐야? 내가 아는 거라곤 내가 웬 소 사나이를 죽였다는 것…….”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얼마나 많은 캠프 아이들이 너 같은 기회를 얻고 싶 어 하는지 알아?” “살해당할 기회?” “미노타우로스와 싸울 기회! 우리가 뭘 위해 훈련하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봐, 내가 싸운 상대가 정말로 그 미노타우로스라면 , 신화 속 바로 그 녀석이 라면…….” “맞아.” “그렇다면 미노타우로스는 하나뿐이잖아 .” “그렇지.” “그 놈은 까마득한 옛날에 죽은 거잖아?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죽였다고. 그러 니까…….” “괴물들은 죽지 않아, 퍼시. 살해당할 수는 있지. 하지만 죽지는 않는다고.” “오, 고마우셔라. 아주 명쾌해지네.” “그들에겐 너나 나 같은 영혼이 없어. 잠시 동안 없앨 수는 있지. 운이 좋다면 평생도 가능해. 하지만 그들은 원초적인 힘이야. 키론은 그들을 ‘원형’이라고 불러. 그들은 결국에는 다시 만들어져.” 나는 도즈 선생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우연히 검으로 괴물을 찔러 죽였다면…… .” “푸…… 아니, 너희 수학 교사 말이지. 맞아. 아직 저 밖에 존재해. 넌 그냥 놈
을 무지무지 화나게 만든 것뿐이야.” “어떻게 도즈 선생에 대해 알아?” “네가 자면서 말했잖아.”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고 했지. 푸리아이? 그건 하데스의 고문관들 아냐?” 아나베스는 땅이 갈라져서 자기를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하게 땅바닥을 보며 말했다.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면 안 돼. 아무리 캠프 안이라고 해도. 그들에 대해 얘기 할 때는 ‘친절한 그들’이라고 불러.” “이봐, 도대체 천둥소리를 불러오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게 있긴 한 거야?” 내가 듣기에도 짜증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거나 내가 왜 11 번 숙소에 있어야 하는 건데? 왜 다들 그렇게 복닥거리고 있는 거야? 저쪽에 빈 침대가 많이 있는데.” 내가 앞 번호의 통나무집들을 가리키자 아나베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숙소를 맘대로 고를 순 없어, 퍼시. 숙소 배정은 네 부모님이 누구냐에 달려 있는 거야.” 아나베스는 내가 이해하길 기다리면서 빤히 보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샐리 잭슨이야. 그랜드센트럴 역에 있는 사탕 가게에서 일하시 지. 아니, 일하셨다고 해야겠네.” “너희 엄마 일은 유감이야, 퍼시.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야. 다른 쪽 부모를 말 하는 거야. 네 아버지.” “아버진 돌아가셨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나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아이들과도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이 분명했 다. “네 아버진 돌아가시지 않았어, 퍼시.”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네가 우리 아버지를 알아?” “아니, 물론 모르지.” “그런데 어떻게…….” “난 너를 아니까. 네가 우리와 같지 않았다면 여기 있을 리 없으니까.” “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럴까?” 아나베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장담하는데 넌 이 학교 저 학교를 떠돌았을 거야. 많은 학교에서 쫓겨났겠 지.” “어떻…….” “난독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테지. 아마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도.” 나는 당혹감을 감추려 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한데 묶어 놓으면 거의 확실한 징후가 되지. 읽으려고 하면 글자들이 종이 위 로 떠오르지? 그건 네 정신이 고대 그리스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는…… 넌 충동적이고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질 못 하지. 그건 네 전투 반사 신경 때문이야. 실제 싸움에서는 그게 너를 지켜 주지. 주의력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그건 네가 너무 많은 것을 보기 때문이야. 퍼시, 너무 적게 보아서가 아니라. 네 감각은 보통 인간보다 뛰어나.
물론 교사들은 네가 약물치료를 받길 원하지. 대부분 괴물들이야. 네가 자기들의 실제 모습을 보길 원치 않는 거야.” “듣다 보니 너도 같은 일을 겪은 모양이구나?” “여기 있는 아이들 대부분이 겪었지. 네가 우리와 같지 않다면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는 말할 것도 없고 미노타우로스한테서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암브로시아와 넥타르.” “널 회복시키려고 먹인 음식. 보통 아이가 그걸 먹으면 죽어. 피가 불타고 뼈가 모래처럼 변해서 죽는다고. 받아들여. 넌 반쪽 피야.” 반쪽 피. 수많은 질문이 맴돌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신참!” 그쪽을 보았다. 보기 흉한 빨간색 숙소에 있던 덩치 큰 여자 아이가 우리 쪽으 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는 하나같이 자기처럼 덩치 크고 못생기고 비열해 보 이는 데다 똑같은 위장 전투복을 입은 여자 애 셋을 거느리고 있었다. 아나베스가 한숨을 쉬었다. “클라리스, 가서 창이나 손질하지 그래?” 덩치 큰 여자 아이가 대꾸했다. “그러고말고, 공주마마. 그래야 금요일 밤에 널 창에 꿰어 주지.” “에레 에스 코라카스!” 나는 아나베스가 한 말이 그리스어로 ‘까마귀한테나 가!’라는 뜻임을 이해했 다. 듣기보다 훨씬 지독한 저주라는 느낌이긴 했지만. “너에겐 기회도 없을걸.” “가루로 만들어 주지.” 클라리스는 그렇게 대꾸했지만 눈이 떨렸다. 그에 걸맞은 만큼의 자신이 없는 지도 몰랐다. 클라리스는 내 쪽으로 돌아섰다. “이 꼬마는 누구신가?” 아나베스가 말했다. “퍼시 잭슨, 이쪽은 클라리스야. 아레스의 딸이지.” 나는 눈을 끔벅였다. “그러니까 전쟁의 신 말이야?” 클라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뭐 유감이라도 있어?” 나는 재치를 회복하고 말했다. “아니. 어쩐지 냄새가 지독하더라.” 클라리스가 으르렁거렸다. “우리에겐 신참을 위한 입문식이 있다, 프리시.” “퍼시야.”
“아무려나. 와라, 보여 주지.” “클라리스…….” 아나베스가 입을 열었다. “물러나 있으시지, 똑똑아.” 아나베스는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물러났고, 나는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새로 왔으니 내 지위는 내가 획득해야 했다. 나는 아나베스에게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건네고 싸울 태세를 갖췄지만, 정신 을 차리기도 전에 클라리스가 내 목을 잡고 화장실임이 분명한 콘크리트 건물 로 끌고 가고 있었다. 나는 발버둥을 쳤다. 전에도 싸움은 많이 해 봤지만, 이 덩치 큰 클라리스는 손 이 강철 같았다. 클라리스는 나를 여자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 한쪽에는 칸막 이 화장실이, 반대쪽에는 샤워실이 줄지어 있었다. 여느 공공 화장실과 다를 바 없는 냄새가 났다. 나는 클라리스가 내 머리카락을 뽑는 와중에 생각했다. 이곳 이 신들의 장소라면 고급 변기를 사야 하지 않았나 하고 말이다. 클라리스의 친구들은 왁자지껄하게 웃고 있었다. 난 미노타우로스와 싸웠을 때와 같은 힘을 불러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클라리스가 나를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자기가 무슨 ‘빅 3’라도 되는 줄 아나? 그렇지. 미노타우로스도 얘가 너무 멍 청하게 생겨서 웃다가 넘어갔나 보다.” 친구들이 낄낄거렸다. 아나베스는 구석에 서서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상황을 보고 있었다. 클라리스는 나를 무릎 꿇리고 내 머리를 변기 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녹 슨 파이프와 용변 냄새가 확 올라왔다. 나는 고개를 들고 있으려고 낑낑댔다. 더껑이가 앉은 물을 들여다보면서 저 속으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그 순간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다. 배 속이 당기는 느낌이 났다. 수도관이 덜거 덕거리고 파이프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머리를 잡은 클라리스의 손아 귀가 느슨해졌다. 변기에서 물이 튀어나와 내 머리 위로 원을 그렸고, 그 다음 에 내가 아는 것이라곤 화장실 타일에 주저앉은 내 뒤에서 클라리스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고개를 돌린 순간 화장실 바닥에서 다시 솟아오른 물이 클라리스의 얼굴 을 세게 쳐서 엉덩방아를 찧게 만들었다. 물은 소화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 럼 클라리스를 때리며 샤워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클라리스는 숨이 막혀서 발버둥을 쳤고, 친구들이 그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 다. 그러나 그때 다른 변기들도 폭발했고, 변기 물줄기 여섯 개가 그들을 강타 했다. 샤워기도 활동을 개시, 모든 붙박이 수도가 일제히 위장 전투복을 입은 여자 아이들에게 물보라를 날려 떠내려가는 쓰레기처럼 화장실 밖으로 밀어냈 다. 그들이 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속이 당기는 느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물은 터져 나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금세 멈췄다. 온 화장실이 물바다였다. 아나베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나베스는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문 밖으로 밀려 나가지는 않았다. 정확히 같은 자리에 서 서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내가 물바다 사이에서 유일하게 마른 곳에 앉아 있음을 알아챘다. 내 주위로 둥글게 물기 없는 바닥이 남아 있었다. 내 옷에는 물 한 방 울 묻지 않았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아나베스가 말했다. “어떻게…….” “나도 몰라.” 우리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밖에서는 클라리스와 그 친구들이 진흙탕에서 허 우적댔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둘러서서 그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클 라리스의 얼굴에 머리가 착 달라붙어 있었다. 위장 전투복은 흠뻑 젖었고 하수 도 냄새가 났다. 클라리스는 증오 그 자체인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넌 죽었어, 신참. 끝장이야.” 가만히 있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말했다. “다시 변기 물로 양치질하고 싶으냐, 클라리스? 입 닫으시지.” 친구들이 클라리스를 붙잡아야 했다. 그들이 클라리스를 끌고 5 번 숙소로 가 는 사이 다른 캠프 아이들은 마구 휘두르는 클라리스의 발길을 피해 다녔다. 아나베스는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냥 불쾌해하는 건지 자기한테 물세례를 퍼부은 것에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뭐야? 무슨 생각을 하는데?” 내 물음에 아나베스가 대답했다. “깃발 잡기에서 네가 우리 팀에 들어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제 7 장 신께 올리는 번제 화장실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졌다. 가는 곳마다 캠프 참가자들이 나를 가리키며 그 일에 대해 수군댔다. 아니면 아직도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 는 아나베스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던 것 뿐일까? 아나베스는 나에게 몇 군데를 더 안내했다. 아이들이 각자의 검을 벼리고 있는 대장간, 사티로스들이 거대한 염소 인간 대리석상에 모래를 뿌려 갈고 있는 미 술 공예장, 그리고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벽으로 이루어진 암벽 등반용 벽. 이 벽은 심하게 흔들리고 돌을 떨어뜨리고 용암을 뿌려 댔으며, 빠른 시간 안에 꼭 대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서로 충돌했다. 마침내 우리는 카누 연습용 호수에 돌아왔고, 여기서부터 길은 통나무집들 쪽 으로 이어졌다. 아나베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난 훈련하러 가야 해. 저녁은 7 시 30 분이야. 숙소 아이들을 따라 식당으로 오 기만 하면 돼.” “아나베스, 화장실 일은 미안해.” “그렇겠지.” “내 잘못이 아니었어.” 아나베스는 회의적인 눈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그게 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 다.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물이 튀어나오게 만든 것은 나였다. 어떻게 그랬는지 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변기들은 나에게 반응했다. 내가 수도관을 지배했다. 아나베스가 말했다. “넌 오러클(신탁, 신탁 장소, 신탁을 하는 예언자를 뜻함)과 얘기해 봐야 해.” “누구?” “누구가 아니야. 오러클이라니까 . 내가 키론에게 물어볼게.” 나는 제발 한 번이라도 누가 직선적으로 대답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호수 안을 들여다보았다.
호수 바닥에서 누군가가 나를 마주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6 미터쯤 아래쪽에서 교각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십대 여자 아이 두 명을 발 견하자 가슴이 철렁했다. 청바지에 반짝이는 녹색 티셔츠를 입었고, 어깨 주위 에 느슨하게 떠다니는 갈색 머리 사이로 작은 물고기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웃으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아나베스가 경고하듯 말했다. “부추기지 마. 나이아스(물의 정령)는 끝내 주는 바람둥이들이야.” “나이아스라.” 나는 완전히 질린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됐어. 이제 집에 갈래.” 아나베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해가 안 되니, 퍼시? 넌 집에 온 거야. 여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안전한 곳이야.” “우리 같다면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애들 말이야?” “인간이 아닌 존재 말이야. 뭐 어쨌든 완전한 인간은 아니지. 반쪽 인간이니 까.” “반쪽 인간이면 나머지 반쪽은 뭔데?” “알 텐데.”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받아들여야 했다. 팔다리가 따끔거 리는 느낌, 엄마가 아빠에 대해 말할 때 가끔 느꼈던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말했다. “신. 반쪽 신이란 말이지.” 아나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는 돌아가신 게 아니야, 퍼시. 올림포스 신 중 하나지.” “말도 안 돼.” “그래? 옛날이야기에서 신들이 제일 많이 하는 짓이 뭐였는데? 돌아다니면서 인간과 사랑에 빠져서 아이를 낳았지. 지난 몇천 년 사이에 버릇이 달라졌을 것 같아?” “하지만 그건 그냥…….” 나는 또 한 번 신화라고 말할 뻔했다가 2 천 년만 지나면 나 또한 신화로 여겨 질지 모른다던 키론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여기 있는 모든 아이들이 반쪽 신이라면…….” “반인반신. 공식 명칭은 반인반신이야. 아니면 반쪽 피라고 하거나.” “그러면 네 아버지는 누구야?” 교각 난간을 쥔 아나베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방금 민감한 주제를 건 드렸음을 눈치챘다. “우리 아빤 웨스트포인트 교수야.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론 본 적이 없어. 미국 역사를 가르치시지.” “인간이잖아.” “뭐? 너 남성 신만이 인간 여성에게 매력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게 무슨 성 차별이야?” “그럼 누가 너희 엄만데?” “6 번 숙소.”
“의미는?” 아나베스는 허리를 폈다. “아테나야. 지혜와 전투의 여신.” 좋다. 안 될 게 뭔가? “그럼 우리 아빠는?” “미확정이야. 아까 말한 대로. 아무도 몰라.” “우리 엄마는 제외해야지. 엄마는 알고 있었어.” “아닐 수도 있어, 퍼시. 신들이 늘 정체를 드러내는 건 아니거든.” “아빠는 드러냈어. 엄마를 사랑했으니까 .” 아나베스는 조심스러운 눈길로 나를 보았다. 나를 흥분시키고 싶지 않은 눈치 였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신호를 보낼지도 몰라.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야. 네 아버지가 너한테 자기 아들임을 주장하는 신호를 보내 는 것. 그럴 때도 있지.” “아닐 때도 있고?” 아나베스는 손바닥으로 난간을 쓸었다. “신들은 바빠. 애들도 많고 언제나…… 음, 때로는 우리에게 마음 쓰지 않기도 해, 퍼시. 우릴 무시하지.” 나는 헤르메스 숙소에서 본 부루퉁하고 우울해 보이던 십대 아이들, 결코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는 것 같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얀시 아카데미에도 그런 아 이들이 있었다.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는 부자 부모들이 기숙학교로 보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신이라면 그보다는 낫게 행동해야 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난 여기 박힌 거로군. 그게 다야? 평생?” “경우에 따라 달라. 어떤 아이들은 여름 동안만 있지. 아프로디테나 데메테르 의 아이라면 그렇게 강력한 힘은 없을지도 몰라. 그럴 경우 괴물들은 널 무시할 수도 있고, 따라서 넌 몇 달 동안 여름 훈련을 받고 나머지 기간에는 인간 세계 에서 살 수 있어. 하지만 어떤 아이들에게는 떠나는 것이 너무 위험해. 우린 일 년 내내 머물러. 인간 세계에 나가면 괴물들을 끌어들이거든. 괴물들은 우리를 감지하고 도전하러 오지. 대개 괴물들은 말썽을 일으킬 만큼 클 때까지는, 열 살이나 열한 살 정도까진 우리를 무시해. 그 이후에는 반쪽 피 대부분이 여기로 오거나 살해당하지. 바깥세상에서 살아남아 유명해지는 사람도 드물게 있긴 해. 이름을 들으면 너도 알 거야. 그 중에는 자기들이 반쪽 피라는 것조차 깨닫 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 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어.” “그러니까 괴물들은 여기 들어올 수 없는 거야?” 아나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숲에 들여놓는 경우나 안에 있는 누군가가 특별히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은.” “뭣 때문에 괴물을 불러들여?” “전투 연습용으로. 짓궂은 장난이지.” “짓궂은 장난?” “중요한 건 인간도 괴물도 들어오지 못하게 경계선이 봉해져 있다는 점이야. 밖에서 인간이 계곡을 들여다보면 딸기 밭만 보일 뿐 이상한 건 전혀 보이지 않 아.” “그럼 넌 일 년 내내 있는 거야?”
아나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티셔츠 목깃 아래에서 각기 다른 색의 진흙구슬 이 다섯 개 달린 가죽 목걸이를 풀었다. 대학 졸업 반지 같은 커다란 금반지가 하나 더 달려 있는 점만 빼면 루크가 하고 있던 목걸이와 똑같았다. “난 일곱 살 때부터 여기 있었어. 여름 학기가 끝나는 8 월 마지막 날마다 또 일 년을 살아남았다는 뜻으로 구슬을 하나 받아. 나는 다른 지도원들보다 더 오래 여기 있었어. 지도원들은 모두 대학에 다녀.” “어째서 그렇게 어렸을 때 온 건데?” 아나베스는 목걸이에 달린 반지를 꼬았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냐.” “아.” 나는 잠시 동안 불편한 침묵을 지키며 서 있었다. “그럼 내가 원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여기에서 걸어 나갈 수 있는 건가?” “자살이나 다름없지만, 미스터 D 나 키론의 허락이 떨어지면 나갈 수 있지. 그 래도 여름 학기가 끝나기 전에는 허락해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다만?” “탐색을 떠나도록 허락받는다면 나갈 수 있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지난 번에…….” 아나베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 말투에서 지난번 일이 잘못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병실에서, 나한테 뭘 먹이고 있었을 때 말인데…….” “암브로시아였어 .” “아무튼. 나한테 하지에 대해 물었잖아.” 아나베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정말로 뭔가 알고 있는 거야?” “어…… 아니. 예전 학교에 있을 때 그로버와 키론이 그 이야기를 하는 걸 엿 들었어. 그로버가 하지에 대해 얘기했었지. 무슨 기한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는 것처럼 말했어.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아나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알았으면 좋겠어. 키론과 사티로스들은 알고 있지만, 우리에게 말해 주 지 않을 거야. 올림포스에서 뭔가가 잘못됐어. 아주 큰일이 생겼어. 지난번에 갔을 때만 해도 모든 게 정상으로 보였는데.” “올림포스에 갔었어?” “일 년 내내 있는 루크, 클라리스, 나, 그리고 몇 명이서 동지에 견학을 갔었지. 신들은 매년 동지 때 대규모 회의를 열거든.” “그렇지만…… 어떻게 갔는데?” “물론 롱아일랜드 철도로 갔지. 펜 스테이션에서 내려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 딩의 특별 엘리베이터를 타고 600 층으로 가면 돼.”
아나베스는 이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너 뉴욕 출신이지?” “아, 물론이지.” 내가 아는 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는 102 층까지밖에 없었지만, 그 점은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아나베스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뒤로 신들이 싸움이라도 시작한 것처럼 날씨가 이상해졌어. 그 뒤로 몇 번인가 사티로스들이 말하는 걸 들었지.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건 뭔 가 중요한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것뿐이야. 그리고 그 물건이 하지 때까지 돌아 오지 않으면 말썽이 생길 거라는 것. 네가 왔을 때 내 희망은…… 그러니까, 아 테나는 아레스만 빼면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거든. 물론 포세이돈과는 경쟁 관 계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런 경우만 아니라면 우리가 같이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뭔가 알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나베스를 돕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더 이상의 질문 을 감당하기엔 너무 배가 고프고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아나베스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난 탐색 여행을 나가야 해. 난 그렇게 어리지 않아. 문제가 뭔지만 말해 준다 면…….” 근처 어딘가에서 바비큐 냄새가 났다. 아나베스도 내 배가 꼬르륵거리는 소리 를 들은 게 분명했다. 가 보라고, 나중에 따라가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전술이라도 짜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난간을 더듬고 있는 아나베스를 두 고 교각을 떠났다. 11
번 숙소에 돌아가 보니 다들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떠들고 법석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많은
아이들이 생김새가 비슷하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오뚝한 코, 치켜올라간 눈썹, 장난기 어린 웃음. 교사들이 말썽꾸러기로 분류할 법한 아이들이었다 . 고맙게도 바닥에 배정된 내 자리로 걸어가서 미노타우로 스 뿔을 내려놓는 동안 내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지도원인 루크가 다가왔다. 루크도 헤르메스 가족 특유의 얼굴형이었다 . 오른 뺨의 흉터 때문에 흠이 생기긴 했어도 루크의 미소는 친근했다. “네가 쓸 침낭을 찾아 놨어. 그리고 여기, 캠프 창고에서 세면 용품도 좀 훔쳐 왔고.” 훔쳤다는 부분은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고마워.” “별것 아냐.” 루크는 내 옆에 앉아서 벽에 등을 기댔다. “힘든 첫날인가?” “난 여기 속하지 않아. 신들을 믿지도 않는걸.” “그래. 다들 그렇게 시작하지. 일단 믿기 시작하면 어떤지 알아? 그래도 별로 편해지지 않아.” 나는 루크의 목소리에 밴 신랄함에 놀랐다. 루크는 아주 태평해 보이는데, 무 슨 일이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인데 말이다. 나는 물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헤르메스?” 루크는 뒷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냈고, 순간적으로 나를 찌르려나 보다고 생각했지만, 그 칼로 샌들 바닥에 달라붙은 진흙을 긁어냈다. “그래. 헤르메스야.” “발에 날개가 달린 전령 말이지.” “맞았어. 전령, 의사, 여행자, 상인, 도둑. 길을 이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해당되 지. 덕분에 너도 여기에서 11 번 숙소의 환대를 즐기고 있는 셈이지. 헤르메스는 후원할 상대를 까다롭게 고르지 않거든.” 나는 루크가 나를 ‘누구나’라고 부른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생각이 많은 것일뿐.
“아빠를 만난 적 있어?” “한 번.” 나는 그가 말하고 싶다면 말을 꺼낼 거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렸다. 아무래도 루 크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일이 오른뺨의 흉터와 어떤 상관이 있는 걸까 궁금했다. 루크는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 퍼시. 여기 캠프 참가자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야. 뭐라고 해 도 우린 대가족 같은 거 아니겠어? 서로를 돌봐 주는 거지.” 루크는 내가 느끼는 상실감을 이해하는 것 같았고, 나는 그 점에 감사했다. 아 무리 지도원이라고 해도 루크처럼 나이 많은 축은 나같이 막 나가는 중학생을 피하는 법이다. 그러나 루크는 숙소에서 따뜻하게 나를 받아 주었다. 심지어 세 면 용품을 훔쳐다 주기까지 했다. 그건 오늘 하루 누군가가 내게 베푼 가장 친 절한 일이었다. 나는 오후 내내 나를 괴롭히던 마지막 질문을 루크에게 던져 보기로 했다. “아레스 숙소의 클라리스가 ‘빅 3’ 어쩌고 하는 농담을 했었어. 그리고 아나베 스는 두 번이나 내가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했고. 오러클과 얘기해 봐야 한 다고도 했어. 그게 다 무슨 소리야?” 루크는 주머니칼을 접었다. “난 예언이 싫어.” “무슨 뜻이야?” 흉터 주위로 루크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그냥 내가 다른 모두를 위해 일을 망쳤다고 해 두자. 내가 헤스페리데스의 정 원으로 갔던 일이 불쾌하게 마무리되고 나서는 2 년 동안 키론은 더 이상의 탐 색 여행을 허락해 주지 않았거든. 아나베스는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죽을 지경 이었고. 아나베스가 들볶는 바람에 키론은 결국 아나베스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고 말았지. 오러클에게 예언을 받았다고. 전체 내용을 말해 주진 않 고 아나베스가 아직 탐색 여행을 떠날 운명이 아니라고만 했어. 아나베스 는…… 특별한 누군가가 캠프에 오길 기다려야 했어.” “특별한 누군가?” “걱정 마. 아나베스는 여기 새로 온 아이들은 누구든 자기가 기다리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해. 가자, 저녁 식사 시간이야.” 루크가 그렇게 말한 순간 멀리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소 리인데도 어째서인지 소라고둥임을 알 수 있었다. 루크가 외쳤다. “11 번, 정렬!” 스무 명쯤 되는 아이들 모두가 공동 마당에 줄지어 섰다. 서열 순으로 섰고, 당 연히 나는 꼴찌였다. 다른 숙소에서도 아이들이 나왔다. 끄트머리의 세 숙소와, 낮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해가 저물자 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한 8 번 숙소만 빼 고. 우리는 식당 파빌리온이 있는 언덕으로 행진해 올라갔다. 풀밭에서 사티로스 들이 합류했다. 카누 연습용 호수에서 나이아스들이 나왔다. 숲에서도 여자 애 들이 몇 명 나왔는데, 정확히 말하면 숲이 아니라 나무 자체에서 나왔다. 단풍 나무 옆구리에서 아홉 살, 열 살 정도 된 여자 아이가 녹아 나와서 언덕으로 뛰 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 합해서 캠프 참가자가 백여 명, 사티로스가 수십 명, 나무 정령과 나이아스 가 십여 명 정도였다.
파빌리온에 도착하니 대리석 기둥 여기저기에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욕조 만 한 청동 화로 속에서 중앙 화톳불이 타올랐다. 각 숙소에는 자줏빛 테두리를 두른 흰 천을 씌운 식탁이 하나씩 배당되어 있었다. 식탁 네 개가 비어 있었지 만 11 번 식탁은 자리가 부족했다. 나는 엉덩이를 반쯤 벤치 끝에 걸치고 끼어 앉아야 했다. 그로버가 미스터 D 와 다른 사티로스 몇 명, 그리고 미스터 D 와 꼭 닮은 하얗 고 통통한 남자 애 둘과 같이 12 번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키론은 한쪽 옆에 서 있었다. 야외 식탁은 켄타우로스에게 너무 작았다. 아나베스는 자기와 똑같이 회색 눈에 금발 머리를 한 건강하고 심각해 보이는 아이들 한 무리와 같이 앉아 있었다. 클라리스는 내 뒤에 있는 아레스 식탁에 앉았다. 물세례를 받은 충격을 극복했 는지 깔깔거리며 친구들에게 대고 트림을 하고 있었다. 키론이 파빌리온의 대리석 바닥에 대고 발굽을 구르자 모두 조용해졌다. 키론 은 잔을 들어 올렸다. “신들을 위하여!” 모두가 잔을 들어 올렸다. “신들을 위하여!” 님프들이 음식 쟁반을 들고 나왔다. 포도, 사과, 딸기, 치즈, 갓 구운 빵, 그리고 바비큐! 내 잔은 비어 있었지만 루크가 말했다. “말만 해. 마시고 싶은 건 뭐든. 물론 술은 빼고.” 나는 말했다. “체리 콜라.” 잔이 거품이 이는 단 음료수로 가득 찼다. 그러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파란색 체리 콜라.” 음료가 코발트색이 감도는 보랏빛으로 변했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셔 보았다. 완벽했다. 나는 엄마를 위해 건배했다.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엄마는 돌아가신 게 아니다. 어쨌든 영영 가 버리신 건 아니다. 지하 세계에 계신다. 그리고 지하 세계가 실제로 있다면 언젠가 는……. “받아, 퍼시.” 루크가 김이 오르는 살코기 쟁반을 건넸다. 접시를 채우고 한 입 크게 베어 물 려다가 다들 일어서서 접시를 들고 파빌리온 중앙에 있는 불로 다가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후식이라도 받으러 가는 건가 의아했다. “이리 와.” 루크가 말했다. 가까이 가자 모두들 자기 음식을 조금 덜어 내어 불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제 일 잘 익은 딸기, 제일 맛있는 소고기, 제일 따뜻하고 버터가 많이 든 롤빵. 루크가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신들에게 번제(燔祭)를 지내는 거야. 신들은 그 냄새를 좋아하거든.” “농담이겠지.” 루크의 표정은 경솔하게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나는 강력한 불 사신들이 무엇 때문에 음식 타는 냄새를 좋아하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루크가 불 가까이 가더니 고개를 숙이고 잘 영근 포도송이를 던져 넣었다. “헤르메스께.” 내가 그다음 차례였다. 어느 신의 이름을 말해야 할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소리 없이 기도했다. ‘누구든 나에게 말해 줘요, 제발.’ 나는 커다란 살코기 조각을 불꽃에 던져 넣었다. 불 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맡고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음식 타는 냄새가 아니었다. 따뜻한 초콜릿 음료와 갓 구운 브라우니, 그릴 위 에서 지글거리는 햄버거와 야생화, 그 밖에 한데 섞일 수 없는 백 가지 좋은 것 들의 냄새가 났다. 신들이 그 연기만 맡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믿어질 정도였다. 모두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식사를 끝내자 키론이 다시 발굽을 굴러 주의를 끌었다. 미스터 D 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그래, 너희 망나니들에게 안녕하냐는 말을 해 줘야겠지. 어때, 안녕하신가? 우리 활동 지도자인 키론이 다음 깃발 잡기는 금요일이라고 하는군. 현재 5 번 숙소가 월계관을 쥐고 있다.” 아레스 식탁에서 듣기 싫은 갈채가 쏟아졌다. 미스터 D 가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다만 축하한다. 또한 오늘 새로운 캠프 참가자가 왔다는 말을 해야겠지. 피터 존슨이다.” 키론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에, 퍼시 잭슨이다. 그렇지. 만세, 기타 등등. 이제 바보 같은 캠프파이어로 달 려가 보도록. 이상.” 모두가 환호했다. 모두 원형극장으로 향했고, 아폴로 숙소가 선창해서 노래를 불렀다. 신들에 대한 캠프 노래를 부르고, 스모어를 먹고 농담을 했으며, 흥미 롭게도 더 이상 아무도 나를 노려보는 것 같지 않았다. 집에 온 듯한 기분이었 다. 그날 밤 늦게, 캠프파이어에서 오른 불티가 별이 빛나는 하늘로 소용돌이쳐 오 르면서 소라고둥이 다시 울렸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빌 린 침낭 위에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손가락이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감아쥐었다. 나는 엄마에 대해 생각했는데, 좋 은 것만 떠올렸다. 엄마의 웃는 얼굴, 어렸을 때 엄마가 자기 전에 읽어 주던 이 야기들, 벌레에 물리지 말라고 하던 엄마의 목소리. 눈을 감자 바로 잠이 들었다. 그것이 반쪽 피 캠프에서의 첫날이었다. 내가 얼마나 빨리 새로운 집을 즐기게 될지 알았더라면 좋았으련만. 제 8 장 여름캠프와 신의 아이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사티로스, 님프, 켄타우로스에게 수업을 받는다는 사실 만 빼면 거의 정상적으로 느껴지는 일과에 적응했다. 매일 아침에는 아나베스에게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고, 조금 이상한 느낌이지 만 신과 여신들에 대해 현재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나베스가 난독증에 대해서 한 말이 옳았다. 고대 그리스 어는 그렇게 읽기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영어보다는 덜했다. 나는 며칠 만에 그리 심한 두통 없이 호메로스의 몇 구절을 더듬더듬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야외 활동을 차례로 해 보면서 내가 잘하는 종목을 찾았다. 키론은 내게 궁술을 가르치려 했지만, 내가 활과 화살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것 은 꽤 빨리 알 수 있었다. 키론은 꼬리에서 짚 화살을 제거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달리기? 역시 잘 못했다. 나무 정령 강사들은 나를 압도하고 달려가 버렸다. 그 들은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자기들은 사랑에 애태우는 신들에게서 달아나 는 연습을 수백 년이나 했다면서. 그렇다 해도 나무보다 느리다는 건 조금 창피 한 일이었다. 레슬링은? 관두자. 나는 매트에 오를 때마다 클라리스에게 박살이 났다. 클라 리스는 내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아직 멀었어, 풋내기.” 내가 뛰어난 성적을 보인 종목이라곤 카누밖에 없었는데, 미노타우로스를 때 려눕힌 아이에게 기대할 만한 영웅적인 기술은 아니었다. 나는 선배 참가자와 지도원들이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내려 애쓰며 나를 지 켜보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 쉽지가 않았다. 나는 아레스 애들처럼 강하거 나 아폴로 애들만큼 활을 잘 쏘지 못했다. 헤파이스토스 애들 같은 야장 기술도 없었고, 부디 아니길 바랐지만 디오니소스 애들의 덩굴식물 키우기 능력도 없 었다. 루크는 내가 모든 기술에 능하지만 어느 것도 최고는 아닌 헤르메스 아이 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내 기분을 달래 주려고 한 말일 뿐이었다. 루크 도 나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캠프는 마음에 들었다. 해변에 깔리는 아침 안 개, 오후의 뜨거운 햇살 아래 딸기 밭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 밤이면 숲에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소리까지도 익숙해졌다. 11 번 숙소와 함께 저녁을 먹고 불 속에 음식물을 떼어 던져 넣으면서 진짜 아빠와 연결된 기분을 느끼려고 노력 했다. 물론 아무 신호도 오지 않았다. 그저 늘 품고 있던 아빠의 미소에 대한 기 억처럼 따뜻한 느낌뿐이었다 . 엄마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계속 생각이 났다. 만약 신과 괴물이 다 진짜라면, 이 모든 마법 같 은 것들이 가능하다면 분명 엄마를 구할 방법이, 다시 이곳으로 데려올 방법이 있을 거라고. 나는 루크의 냉소와 그가 아버지 헤르메스를 원망하는 태도를 이해하기 시작 했다. 그래, 신들에겐 중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가끔 한 번씩은 전 화를 하거나 천둥을 쳐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디오니소스는 공기로 다이어 트 콜라를 만들어 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 아빠는 왜 전화기를 만들어 낼 수 없단 말인가? 반쪽 피 캠프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난 목요일 오후, 첫 검술 수업이 있었다. 11 번 숙소 아이들 모두가 커다란 원형 경기장에 모였고, 루크가 우리의 강사로 나섰다. 우리는 그리스 갑옷에 짚을 채워 넣은 인형을 이용하여 기본적인 찌르기와 베 기부터 시작했다. 괜찮았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이해했고, 반사 신경도 좋았다. 문제는 내 손에 딱 맞는 검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너무 무겁거나 너무 가볍거나 너무 길었다. 루크는 내게 맞는 검을 찾아 주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연습용 검들 중에는 맞는 것이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우리는 둘씩 짝을 이룬 시합으로 이동했다. 루크는 내가 초보자니까 자기가 짝 이 되겠다고 했다. 한 아이가 말했다. “행운을 빈다. 루크는 지난 3 백 년 동안 제일 뛰어난 검투사거든.” “살살 해 주겠지.” 내 말에 그 아이는 코웃음을 쳤다.
루크는 나에게 돌진과 받아넘기기, 방패 막기를 힘든 방식으로 보여 주었다. 맞을 때마다 조금씩 지치고 멍이 늘어 갔다. “가드를 올려야지, 퍼시.” 루크는 그렇게 말하고 칼등으로 내 갈빗대를 때렸다. “아니, 그렇게 높이는 말고!” 퍽! “찌르기!” 퍽! “이번엔 후방!” 퍽! 루크가 휴식을 선언할 때쯤에는 나는 이미 땀투성이였다. 다들 시원한 음료수 냉장고에 몰려들었다. 루크는 얼음물을 머리에 부었고, 좋은 생각 같아서 나도 그렇게 했다. 곧바로 기분이 좀 나아졌다. 팔에 힘이 되돌아왔다. 검도 그렇게 불편하지 않 았다. 루크가 명령했다. “좋아, 다들 원을 그리고 선다! 퍼시만 괜찮다면 간단한 시범을 보여 주고 싶 다.” 멋지군. 다들 퍼시가 두들겨 맞는 광경을 보시라. 헤르메스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도 전에 이 자리에 서 보았고, 루크가 어떻게 나를 샌드백으로 삼을지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음을 눈치 챘다. 루크는 모두에게 무장 해제 기술을 시범으로 보이 겠다고 말했다. 칼등으로 적의 칼날을 비틀어 돌려서 무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루크가 강조했다. “이건 어려운 기술이야. 나도 당한 적이 있어. 퍼시를 보고 웃지 마. 대부분의 검투사가 이 기술을 연마하는 데 몇 년씩 걸리니까.” 루크는 느린 동작으로 나에게 움직임을 시연했다. 당연하게도 내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내가 검을 주운 뒤 루크가 말했다. “이번엔 실시간으로. 한 사람이 이길 때까지 계속 상대한다. 준비됐나, 퍼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크가 공격해 왔다. 나는 어찌어찌 루크가 내 칼자루를 때리는 것을 피했다. 감각이 열렸다. 루크의 공격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반 격했다. 전진해서 찌르려고 했다. 루크는 쉽사리 공격을 흘렸지만, 그의 표정은 변해 있었다. 눈이 가늘어지더니 더 강한 힘으로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손에 쥔 검이 점점 무거워졌다. 균형이 맞지 않았다. 루크가 나를 눕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나는 생각했다. 밑져야 본전 아냐? 나는 무장 해제 기술을 시도했다. 내 검의 날이 루크의 검 아래쪽을 쳤고, 나는 온몸의 무게를 실어 검을 비틀었 다. 철컹. 루크의 검이 돌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내 검 끝은 활짝 편 루크의 가슴에서 몇 센티미터 앞에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조용했다. 나는 검을 내렸다. “어, 미안.” 루크는 어리벙벙해서 잠시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그러더니 흉터 진 얼굴이 활짝 웃는 얼굴로 변했다. “신들의 이름으로! 퍼시,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다시 보여 줘 봐!”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잠깐 폭발했던 부자연스러운 힘은 완전히 나를 떠났 다. 그래도 루크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에는 겨룰 것도 없었다. 검이 닿자마자 루크가 내 검자루를 쳐서 검을 바 닥에 날려 보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구경하던 누군가가 말했다. “초보자의 행운인가?” 루크는 이마의 땀을 닦고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관심이 어린 눈으로 나를 평가 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퍼시가 손에 맞는 검을 쥐면 얼마만큼 할 수 있을지 궁금 한걸.” 금요일 오후, 죽을 뻔했던 암벽 등반 연습을 뒤로하고, 그로버와 나는 호숫가 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로버는 산양처럼 재빨리 꼭대기까지 뛰어 올라 갔지만 나는 용암을 덮어쓸 뻔했다. 셔츠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구멍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앞머리도 그슬렸다. 물 밑에서 바구니를 짜는 나이아스들을 교각에 앉아서 보다가 나는 용기를 내 어 그로버에게 미스터 D 와의 대화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로버의 얼굴이 아픈 사람처럼 노랗게 변했다. “괜찮았어. 좋았어.” “그럼 네 진로는 아직 궤도 안에 있는 거야?” 그로버는 초조한 눈으로 나를 흘끔거렸다. “키론이 너한테 내가 수색자 자격증을 원한다는 얘길 했어?” “어…… 아니.” 나는 수색자 자격증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걸 물어볼 적당한 때는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네게 큰 계획이 있고, 그러기 위해 지킴이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인정이 필요하다고만 했어. 그러니까 인정받은 거야?” 그로버는 나이아스들을 내려다보았다. “미스터 D 는 판단을 미루셨어. 네 일은 아직 실패도, 성공도 하지 않았다고.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은 아직 묶여 있다고 하셨어. 네게 탐색 명령이 떨어지면 널 보호하기 위해 나도 같이 가고, 둘 다 무사히 돌아오면 그때는 일을 완수한 것으로 간주하겠대.”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그렇게 나쁜 건 아니네?” “부르르르! 나한테 마구간 청소를 시킬 수도 있긴 했지. 하지만 네가 탐색을 떠나게 될 가능성은…… 그리고 설령 가게 된다고 해도 무엇하러 나와 같이 가 겠어?” “물론 난 너와 같이 가고 싶어!” 그로버는 우울하게 물속을 노려보았다. “바구니 짜기라…… 나도 쓸모 있는 기술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그로버에게도 재능이 많다고 용기를 북돋우고 싶었지만, 그로버는 더 비 참해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동안 카누와 검술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다른 신 들에 대한 찬반 토론을 벌였다. 마침내 나는 그로버에게 비어 있는 통나무집 네 채에 대해 물었다. “은색의 8 번 숙소는 아르테미스에게 속해. 영원히 처녀로 있겠다고 맹세한 신 이니 물론 아이도 없지. 그 집은 명예직 같은 거야. 그래도 지어 놓지 않으면 화 를 냈을 테니까.” “그래, 알았어. 하지만 끝에 있는 세 채는? 그게 빅 3 야?” 그로버는 긴장했다. 우리는 민감한 주제에 접근하고 있었다.
“아니야. 그 중 하나, 그러니까 2 번 숙소는 헤라에게 속해. 이것도 명예직이지. 결혼의 여신이니 돌아다니면서 인간과 바람을 피우진 않거든. 그건 남편 쪽 일 이지. 우리가 빅 3 라고 하는 건 강력한 세 형제, 크로노스의 아들들을 뜻해.”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 말이구나.” “맞아. 아는구나. 티탄족과의 대전 이후 아버지로부터 세상을 넘겨받은 그들 은 누가 어디를 지배할지 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지.”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제우스가 하늘을, 포세이돈이 바다를, 하데스가 지하 세계를 얻었지.” “그렇지.” “하지만 하데스 숙소는 없잖아.” “없지. 올림포스에도 그의 옥좌는 없어. 지하 세계에 자기만의 옥좌가 있지. 여 기에 그의 숙소가 있었다면…… .” 그로버는 몸서리를 쳤다. “글쎄, 즐거운 일은 아니었을 거란 정도로 넘어가자.” “하지만 제우스와 포세이돈은, 신화에서는 둘 다 애들이 줄줄이 있었잖아. 왜 그 숙소들이 비어 있지?” 그로버는 불편하게 발굽을 들었다 놓았다. “60 여 년 전, 2 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빅 3 은 더 이상 영웅을 낳지 말자고 합의했어. 그들의 자식은 너무 강하거든. 인간들의 역사에 너무 많은 영향을 미 치고, 너무 많은 대규모 학살을 유발해. 알겠지만 2 차 세계대전도 근본적으로 는 제우스와 포세이돈의 자식들이 한 편, 하데스 자식들이 한 편이 되어 싸운 거였거든. 승리한 제우스와 포세이돈은 하데스에게 자기들과 같이 맹세하게 했지. 더 이상 인간 여성과 관계를 맺지 않기로. 셋 다 스틱스 강에 대고 맹세했 어.” 천둥이 울렸다. 나는 말했다. “그게 제일 심각한 맹세지?” 그로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셋 다 약속을 지켰어? 애를 갖지 말자는?” 그로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17 년 전, 제우스가 다시 손을 댔어. 1980 년대 풍의 풍성한 머리 스타일을 한 TV 스타가 있었는데, 제우스가 참지 못한 거야. 그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 애였는데…… 음, 스틱스 강은 약속을 진지하 게 받아들여. 제우스는 불사신이니까 쉽게 빠져나갔지만 덕분에 딸에게 끔찍 한 운명을 전해 주고 말았지.” “하지만 그건 불공평하잖아! 그 여자 애 잘못도 아닌데.” 그로버는 머뭇거렸다. “퍼시, 빅 3 의 아이들은 다른 반쪽 피보다 강한 힘을 갖고 태어나. 오라(어떤 것이 주위에 내뿜는 신비한 기운)도 강하고 괴물들을 끌어당기는 냄새도 강하 지. 하데스는 그 여자 애에 대해 알았을 때, 제우스가 맹세를 어겼다는 사실에 그리 기뻐하지 않았어. 하데스는 타르타로스에서 제일 지독한 괴물들을 풀어 탈리아를 괴롭혔어. 탈리아가 열두 살이었을 때 사티로스 하나가 지킴이로 배 정됐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 그 사티로스는 탈리아가 친구로 삼은 다른 반쪽 피 둘까지 해서 셋을 여기까지 호위해 오려고 했지. 거의 성공했었어. 저 언덕 꼭대기까지 왔지.”
그로버는 계곡 저 편, 내가 미노타우로스와 싸웠던 소나무를 가리켰다. “‘친절한 그들’ 셋이 지옥견 한 무리를 몰고 쫓아왔어. 그들에게 따라잡히기 직전에 탈리아는 사티로스에게 자기가 괴물들을 막는 동안 다른 두 반쪽 피를 안전하게 데려가라고 말했어. 탈리아는 상처 입고 지쳐 있었고, 사냥당한 짐승 처럼 살고 싶어 하지 않았어. 사티로스는 탈리아 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지 만, 탈리아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고, 다른 두 명도 보호해야 했지. 그래서 탈리 아는 저 언덕 꼭대기에서 홀로 마지막 싸움을 치렀어. 탈리아가 죽자 제우스는 딸을 불쌍히 여겨 소나무로 변하게 했고, 탈리아의 영혼은 지금도 계곡 경계선 을 보호하는 것을 돕고 있어. 저 언덕이 반쪽 피 언덕이라고 불리는 건 그래서 야.” 나는 멀리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지금 들은 이야기에 공허한 기분이 들었고, 죄책감도 느꼈다. 내 또래 여자 애 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혼자 괴물 군단을 상대했다. 그에 비하면 미노타우로스를 상대로 거둔 나의 승리는 별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을지 궁금했다. “그로버, 영웅들이 정말로 지하 세계에 탐색을 갔었어?” “가끔. 오르페우스, 헤라클레스, 후디니(탈출 마술에 능했던 유명한 마술사) 정도지.” “죽은 사람을 데리고 돌아온 적도 있어?” “아니. 한 번도 없었어. 오르페우스가 거의 성공했었지만…… 퍼시, 설마 진지 하게 그런 생각을…….” “아냐.”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냥 궁금한 것뿐이야. 그럼 사티로스는 언제나 반인반신을 지키는 임무를 받아?” 그로버는 방심하지 않고 나를 살폈다. 내가 정말로 지하 세계에 대한 생각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늘 그런 건 아냐. 우린 많은 학교에 잠복해 있어. 위대한 영웅의 자질을 타고 난 반쪽 피의 존재를 알아내려고 하지. 빅 3 의 아이처럼 아주 강력한 오라를 지 닌 아이를 발견하면 키론에게 경보를 울리지. 그런 아이들은 아주 큰 문제를 일 으킬 수 있기 때문에 키론이 감시하려고 하거든.” “그런데 넌 날 찾아냈잖아. 키론은 나한테 특별한 데가 있다고 네가 생각했다 던데.” 그로버는 내가 자기를 함정에 빠뜨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난 그러지…… 아, 들어 봐.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 알겠지만 네가…… 넌 절대 탐색을 허락받지 못할 거고, 난 절대 자격증을 따지 못할 거야. 넌 헤르메 스의 아이일지도 몰라. 아니면 그보다 힘이 약한 신일 수도 있지. 복수의 신 네 메시스라든가. 걱정 말라고. 알았지?” 나는 그로버가 나보다는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는 평소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일이 있었다. 마침내 깃발 잡기 시간이 온 것이다. 접시를 치우자 소라고둥이 울렸고, 우리는 모두 식탁 앞에 섰다. 아나베스와 그 형제 둘이 비단 기치를 들고 파빌리온 안으로 뛰어 들어오자 아 이들은 소리를 지르고 갈채를 보냈다. 기치는 3 미터 정도 길이의 반짝이는 회 색 천이었는데, 올리브 나무 위에 가면올빼미가 그려져 있었다. 파빌리온 반대 편에서는 클라리스와 그 형제들이 크기는 같지만 피가 흐르는 창과 멧돼지 머 리가 그려진 촌스러운 빨간색 천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나는 루크를 돌아보고 소음에 묻히지 않게 큰 소리로 외쳤다.
“저게 깃발이야?” “그래.” “늘 아레스와 아테나가 팀을 이끌어?” “늘 그런 건 아냐. 자주 그러긴 하지만.” “다른 숙소에서 깃발을 잡으면 어떻게 하는 거야? 깃발을 다시 칠해?” 루크는 씩 웃었다. “보면 알 거야. 일단은 깃발을 잡아야지.” “우린 어느 편인데?” 루크는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를 아는 것처럼 음흉한 눈빛을 보냈다. 얼굴에 난 흉터 때문에 횃불 빛을 받으니 사악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린 아테나와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있어. 오늘 밤 우린 아레스에게서 깃발 을 빼앗을 거야. 네가 그 일을 도와야 해.” 팀이 호명되었다. 아테나는 아폴로와 헤르메스라는 제일 큰 두 숙소와 동맹을 맺었다. 보아하니 승리 지원을 받기 위해 특권을 가지고 거래를 한 모양이었다. 샤워 시간이라든가 허드렛일 시간, 제일 좋은 활동 장소 같은 것을 두고 말이 다. 아레스는 나머지 모두와 동맹을 맺었다. 디오니소스, 데메테르, 아프로디테, 헤파이스토스. 디오니소스 아이들은 실제로 뛰어난 운동선수였지만, 둘뿐이었 다. 데메테르 아이들은 자연을 다루는 기술과 야외 활동에서 우세했지만, 그다 지 공격적이지 않았다. 아프로디테의 아들딸들은 별로 걱정스럽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대개 무슨 활동을 해도 앉아서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확인하고 머 리를 손질하며 수다를 떨었다. 헤파이스토스 아이들은 예쁘지 않았고 넷밖에 없었지만 하루 종일 대장간에서 일하기 때문에 덩치가 크고 억셌다. 그 아이들 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아레스 아이들이 남았다. 롱아일랜드에 서, 아니 지구상 어느 곳에서라도 제일 덩치 크고 비열하고 잔인할 아이들이 십 여 명. 키론이 대리석에 대고 발을 굴렀다. “영웅들이여! 규칙은 알 것이다. 개울이 경계선이다. 숲 전체가 개방되어 있 다. 마법 물품은 모두 허용된다. 기치는 눈에 띄는 곳에 세워 두어야 하며, 경비 원을 둘 이상 붙여서는 안 된다. 포로는 무기를 빼앗되 묶거나 재갈을 물리지는 않는다. 살인이나 상대를 다치게 하는 일은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심판 겸 전 장의 의사 역할을 하겠다. 무장하라!” 키론이 양손을 펼치자 식탁 위가 갑자기 장비들로 뒤덮였다. 투구, 청동 검, 창, 금속을 입힌 소가죽 방패……. 내가 말했다. “와우, 진짜로 이런 걸 쓰는 거야?” 루크는 미친 사람 보듯 나를 보았다. “5 번 숙소 친구들에게 꿰이고 싶지 않다면. 자, 키론 생각에는 이게 맞을 것 같 댔어. 넌 경계선 순찰을 맡을 거야.” 내 방패는 NBA 백보드만 했고, 가운데에 커다랗게 카두케우스가 그려져 있었 다. 무게가 백만 킬로그램은 되는 것 같았다. 스노보드 삼아 탄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들고 빨리 뛰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길 바랐다. 투구에는 아 테나 팀에 속한 모든 아이들 것과 마찬가지로 꼭대기에 푸른색 말총 장식이 붙 어 있었다. 아레스와 그 동맹군은 붉은 장식을 했다.
아나베스가 외쳤다. “푸른 팀, 앞으로!” 우리는 환호하고 검을 흔들며 아나베스를 따라 남쪽 숲으로 내려갔다. 붉은 팀 은 우리를 야유하며 북쪽으로 향했다. 나는 장비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간신히 아나베스를 따라잡았다. “이봐.” 아나베스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래서 계획이 뭐야? 나한테 빌려 줄 마법 물품이라도 있어?” 내가 뭔가 훔칠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아나베스는 손을 주머니 쪽으로 가져 갔다. “클라리스의 창만 조심해. 그 창이 몸을 건드리는 건 피해야 해. 그 외에는 걱 정하지 마. 우린 아레스에게서 기치를 빼앗을 거야. 루크가 너에게 할 일을 배 정해 줬어?” “경계선 순찰이래.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쉬워. 개울 옆에 서서 붉은 팀을 막아. 나머지는 내게 맡겨. 아테나에겐 언제 나 계획이 있지.” 아나베스는 나를 두고 앞으로 나갔다. 나는 중얼거렸다. “좋아. 같은 팀이 되면 좋겠다고 해 줘서 기쁘다.” 후덥지근한 밤이었다. 숲은 어두웠고 반딧불이 한 번씩 반짝였다. 아나베스는 바위 위로 콸콸거리며 흐르는 작은 개울 옆에 나를 배치한 다음 나머지 팀과 함 께 숲 속으로 흩어졌다. 푸른 깃이 달린 투구를 쓰고 커다란 방패를 든 채 그곳에 혼자 서 있으려니 바 보가 된 느낌이었다. 청동 검은 전에 시험해 본 모든 검과 마찬가지로 균형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가죽 손잡이가 볼링공처럼 내 손을 잡아당겼다. 실제로 누군가가 나를 공격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올 림포스에도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멀리서 소라고둥이 울렸다. 숲 속에서 함성과 고함 소리, 금속이 부딪치는 소 리, 아이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푸른 깃을 단 아폴로 동맹군이 사슴처럼 내 곁을 지나쳐 개울을 뛰어넘더니 적 진영으로 사라졌다. 멋지군. 늘 그렇듯 재미있는 건 다 놓쳐 버리겠어. 그렇게 생각했을 때 가까운 곳에서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등 줄기를 타고 한기가 올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방패를 올렸다. 뭔가가 슬그머니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 었다. 다음 순간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나는 상대가 물러나는 것을 느꼈다. 개울 반대쪽의 덤불이 터져 나왔다. 아레스 전사 다섯이 어둠 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온 것이다. 클라리스가 높고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저 놈을 해치워!” 투구 틈으로 클라리스의 비열한 돼지 눈이 반짝였다. 클라리스는 1.5 미터가 넘는 창을 휘둘렀고, 미늘이 돋친 금속 창끝이 붉은빛으로 번득였다. 클라리스 의 형제자매들은 표준형 청동 검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녀석들은 개울을 건너 돌격해 왔다. 보이는 곳에 도와 줄 사람이라곤 없었다. 도망칠 수도 있었다. 혹은 아레스 숙소 절반을 상대로 스스로 방어할 수도 있었 다.
나는 첫 번째 녀석이 휘두른 무기를 피했지만, 이 녀석들은 미노타우로스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녀석들은 나를 둘러쌌고, 클라리스가 창으로 나를 찔렀다. 방 패로 막았는데도 온몸이 고통스럽게 떨려 왔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방패를 든 팔은 마비되었고, 공기에서 단내가 났다. 전기였다. 클라리스의 바보 같은 창은 전기를 띠고 있었다. 나는 뒤로 넘어졌 다. 다른 아레스 아이가 검 밑동으로 내 가슴을 때렸고, 나는 엎드렸다. 나를 곤죽이 되도록 걷어찰 수도 있었겠지만 녀석들은 깔깔거리기 바빴다. 클라리스가 말했다. “머리털이나 좀 잘라 줄까? 붙잡아 봐!” 나는 간신히 일어섰다. 검을 들어 올렸지만 클라리스가 창으로 옆을 치자 불꽃 이 흘렀다. 이제 양팔이 다 마비되었다. 클라리스가 말했다. “오, 와우. 이 녀석 무서운데. 진짜 무서워.” “깃발은 저쪽이야.” 나는 화난 목소리로 말하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나오지 않은 것 같 았다. 클라리스의 형제자매 중 하나가 말했다. “그래. 하지만 우린 깃발 따위 상관 안 해. 우리 숙소를 멍청해 보이게 만든 놈 한테만 신경 쓰지.” “내 도움 없이도 바보 같던데, 뭘.” 그 순간에 내뱉기에는 그렇게 현명한 말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두 녀석이 다가왔다. 나는 개울 쪽으로 물러서면서 방패를 들어 올리려 했지 만, 클라리스가 너무 빨랐다. 클라리스의 창이 내 갈빗대를 정통으로 때렸다. 흉갑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쉬시 케밥(작게 토막 낸 고기와 야채를 꼬치에 번갈아 끼워 구운 터키 요리) 꼴이 났을 것이다. 그래도 전기 충격에 이가 흔들 릴 정도였다. 아레스 아이들 중 하나가 검을 휘둘러 내 팔에 큼지막한 상처를 냈다. 내 피를 보자 현기증이 났다. 따뜻하면서 동시에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가까스로 말했다. “상처 입히는 건 금지잖아.” 그 녀석이 말했다. “이런, 디저트를 못 얻어먹게 생겼네.” 녀석은 나를 개울에 밀어 넣었고, 나는 첨벙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다섯 명 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녀석들이 가지고 노는 데 싫증 내는 순간 죽 은 목숨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물이 내 감각 을 일깨운 것 같았다. 엄마가 만들어 준 더블 에스프레소 젤리를 봉지째로 먹은 기분이었다. 클라리스와 그 숙소 녀석들이 나를 잡으러 개울에 들어왔지만 나는 서서 그들 을 맞이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다. 칼등으로 첫 번째 녀석의 머리를 후려갈겨 투구를 날려 버렸다. 어찌나 세게 쳤던지 물속에 엎어지는 녀석의 눈 이 돌아가는 게 보일 정도였다. 못난이 2 번과 못난이 3 번이 다가왔다. 나는 방패로 한 녀석의 얼굴을 때리고, 검으로 다른 녀석의 말총을 잘랐다. 둘 다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못난이 4 번은 그다지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였지만, 클라리스는 전기 에너지가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창끝을 겨누고 계속 다가왔다. 클라리스가 창을 찌르자 마자 나는 방패와 검 사이에 창 자루를 낀 다음 나뭇가지 꺾듯 부러뜨렸다. 클라리스가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아! 이 멍청한 놈! 이 썩은 내 나는 벌레 자식!” 클라리스는 더 심한 말을 하고 싶었겠지만, 나는 검 자루로 그 미간을 때려 개 울 속에 큰 대 자로 눕게 만들었다. 그때 함성과 환호성이 들렸고, 루크가 붉은 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경계선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헤르메스 아이들 몇 명이 측면에서 루크의 퇴각을 돕고 있었고, 그 뒤에서는 아폴로 아이들 몇 명이 헤파이스토스 아이들과 싸우고 있 었다. 아레스 녀석들이 일어섰고, 클라리스는 멍한 상태로 욕설을 뱉고는 외쳤 다. “속임수! 속임수였어!” 녀석들은 비틀거리며 루크 뒤를 쫓았지만 너무 늦었다. 루크가 우방으로 넘어 오자 모두가 개울에 모여들었다. 우리 편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붉은 기치가 희 미하게 반짝이더니 은빛으로 변했다. 멧돼지와 창 그림이 11 번 숙소의 상징인 카두케우스로 변했다. 푸른 팀 전원이 루크를 어깨 위에 들어 올리고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키론이 숲 속에서 달려 나와 소라고둥을 불었다. 시합은 끝났다. 우리가 이긴 것이다. 내가 축하 행렬에 합류하려 했을 때 아나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냇물 안에 있는 내 바로 옆에서 말이다. “나쁘지 않았어, 영웅.” 그쪽을 보았지만 아나베스는 없었다. “그렇게 싸우는 건 대체 어디에서 배웠어?” 하는 말과 함께 공기가 희미하게 반짝이더니 이제 막 벗은 양키스 야구 모자를 손에 든 아나베스가 나타났다. 화가 치밀었다. 아나베스가 방금 전까지 투명했다는 사실에도 당황하지 않을 정도였다. “날 함정에 빠뜨렸어. 클라리스가 날 쫓아올 걸 알고 여기에 배치한 다음 루크 가 측면으로 우회하게 만들었던 거야. 다 계산하고 있었어.” 아나베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잖아. 아테나는 언제나, 언제나 계획이 있다고.” “날 박살 낼 계획 말이지.” “난 가능한 한 빨리 왔어. 내가 끼어들려고 했는데…….” 아나베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움이 필요 없겠더라고.” 그러더니 아나베스는 내 다친 팔을 보았다. “어떻게 한 거야?” “검에 베였지. 뭐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검으로 벤 상처 말고. 봐.” 피가 멎었다. 커다란 상처가 있던 자리에 길쭉한 흰색 흉터만 보이더니, 그것 마저 사라졌다. 내가 보는 사이에 긴 상처가 작은 상처로 바뀌더니 없어졌다. “난…… 난 이해가 안 가는데.” 아나베스는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보일 것만 같았다. 아나베스는 내 발밑을 보고 클라리스의 부러진 창을 보더니 말했 다. “물에서 나와 봐, 퍼시.” “뭐?”
“일단 나와.” 개울에서 나오자마자 지독한 피로가 몰려왔다. 팔이 다시 마비되기 시작했다. 아드레날린 분출도 사라졌다. 거의 넘어질 뻔했는데, 아나베스가 부축했다. 아나베스는 욕설을 뱉었다. “오, 스틱스여. 이건 안 좋아. 이걸 바란 게 아니야. 제우스일 줄 알았는 데…….” 대체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전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긴 포효가 숲을 가로질렀다. 캠프 아이들의 환호가 즉시 멎었다. 키론이 고대 그리스어로 무슨 말인가를 외 쳤다. 나중에서야 그게 영어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는데, 그때는 완벽하게 이해 할 수 있었다. “준비 태세! 내 활을!” 아나베스가 검을 뽑았다. 우리 바로 위 바위에 코뿔소만 한 몸집에 용암 같은 붉은 눈과 단검 같은 이빨 을 드러낸 검은 개가 서 있었다. 놈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아나베스 외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나베스가 외쳤다. “퍼시, 도망쳐!” 아나베스는 내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개가 너무 빨랐다. 이빨을 드러낸 거 대한 그림자는 아나베스를 뛰어넘었고, 녀석이 나를 덮치자마자 내가 뒤로 넘 어지면서 면도날 같은 발톱에 갑옷이 찢어지는 것을 느낀 순간, 40 장의 종이가 차례로 찢어질 때와 같은 촤라락 소리가 났다. 개의 목을 뚫고 화살 무더기가 삐져나온 것이다. 괴물은 내 발치에 죽어 넘어졌다. 무슨 조화인지 나는 아직 살아 있었다. 갈가리 찢어진 갑옷을 내려다보고 싶지 않았다. 가슴팍이 따뜻하고 축축한 게 심하게 다친 것이 분명했다. 1 초만 더 지 났으면 괴물 손에 다진 고기 꼴이 되었을 것이다. 손에 활을 든 키론이 심각한 얼굴로 달려왔다. 아나베스가 말했다. “불사의 신들이여! 형벌의 들판에서 온 지옥견이에요 . 저런 것이, 저런 것이 여기에…….” 키론이 말했다. “누군가 불러들인 게다. 캠프 안의 누군가가.” 루크가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들린 기치는 잊혀졌고, 영광의 순간도 끝나 버렸 다. 클라리스가 외쳤다. “다 퍼시 잘못이야! 퍼시가 부른 거라고!” 키론이 말했다. “조용히 해라, 얘야.” 우리는 지옥견의 시체가 그림자로 녹아들어 땅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지는 것 을 지켜보았다. 아나베스가 말했다. “다쳤잖아. 빨리, 퍼시. 물속으로 들어가.” “난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아. 키론, 보세요.” 실랑이하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나는 온 캠프가 모인 가운데 다시 개울에 발 을 들였다. 그 즉시 기분이 나아졌다. 가슴에 난 상처가 아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 가가 숨을 들이켰다.
나는 사과하려고 입을 열었다. “저기 난, 난 왜 이렇게 되는 건지 몰라. 미안…….” 그러나 사람들은 내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내 머리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나베스가 위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퍼시, 저…….” 내가 올려다보았을 때 신호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녹색 홀로그 램이 빙빙 돌면서 반짝이는 것을 알아보았다. 세 갈래로 갈라진 창, 그건 바로 삼지창이었다 . 아나베스가 중얼거렸다. “네 아버지…… 이건 정말 안 좋아.” “확정되었다!” 키론이 선언하자 주위에 서 있던 모든 아이들이, 즐거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아 레스 아이들마저도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내 아버지?”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키론이 대답했다. “포세이돈, 지구를 흔드는 이, 폭풍을 부르는 이, 말들의 아버지다. 만세, 페르 세우스 잭슨, 바다 신의 아들이여.” 제 9 장 사라진 번개를 찾아서 다음 날 아침, 키론은 나를 3 번 숙소로 옮겼다. 아무와도 방을 같이 쓸 필요가 없었다. 내 물건, 즉 미노타우로스의 뿔과 남는 옷 한 벌, 그리고 세면 용품 가방을 놓아둘 공간은 차고 넘쳤다. 저녁 식사 때는 혼자 식탁 하나를 다 차지했고, 내가 하고 싶은 활동도 마음대로 고르고, 자고 싶을 때 ‘소등’이라고 외치고, 다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끔찍하게 비참했다. 11
번 숙소에 안착해서 겨우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을 받고 내가 보통 아이인 것 같은, 어쨌든 반쪽 피 치고는
여느 아이들과 같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을 때 다시 희귀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격리된 것이다. 아무도 지옥견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지만, 내 등 뒤에서는 모두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공격으로 모두가 겁을 먹었다. 두 가지를 전한 셈이었다. 하나는 내가 바다 신의 아들이라는 것. 또 하나는 괴물들이 나를 죽 이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리라는 것. 심지어 언제나 안전하다고 여겨 온 캠 프에까지 침입하지 않았는가. 다른 아이들은 가능한 한 나를 피했다. 11 번 숙소는 내가 숲에서 아레스 녀석 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본 뒤로는 나와 같이 검술 수업을 받기를 꺼렸다. 그래서 나와 루크의 수업은 1 대 1 교습이 되었다. 루크는 전보다 더 거세게 나를 밀어 붙였고, 그 과정에서 나에게 타박상을 입히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타오르는 횃불과 검을 들고 연습하면서 루크는 단언했다. “넌 가능한 모든 훈련을 받아야 할 거야. 이제 다시 독사 목 베기 공격을 시도 해 보자. 50 번 더 반복해.” 아나베스는 여전히 아침에 내게 그리스어를 가르쳤지만, 정신이 다른 데 팔린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미간이라도 찔린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 다.
수업이 끝나자 아나베스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걸어가 버렸다. “탐색…… 포세이돈? …… 이렇게 막가는…… 계획을 세워야 해.” 클라리스마저도 거리를 두었다. 독살스러운 표정으로 봐서는 자기의 마법 창 을 부러뜨린 일로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건 분명했지만 말이다. 나는 클라리스가 그냥 고함을 지르거나 날 때리거나 했으면 싶었다. 무시당하느니 매일 싸우는 편이 나았다.
캠프 안 누군가가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숙소에 들어갔다가 문 앞 에서 바깥세상의 신문을, 대도시의 소식을 담은 페이지가 펼쳐진 『뉴욕 데일 리 뉴스』 한 부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화가 나면 날수록 단어가 더 심하게 둥 둥 떠다녔기 때문에 기사를 읽는 데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괴이한 자동차 사고 뒤 아이와 엄마는 아직도 실종 상태 -에일린 스미스 기자
샐리 잭슨과 아들 퍼시는 수수께끼같이 사라지고 나서 일주일이 지나도록 실 종 상태다. 끔찍하게 불타 버린 이들 가족 소유의 1978 년형 카마로는 지난 토 요일 롱아일랜드 도로 북단에서 지붕이 뜯겨 나가고 앞 차축이 부서진 채로 발 견되었다. 차는 몇 백 미터 가량 미끄러져 가다가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자는 주말여행으로 몬토크에 갔다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급히 떠났다. 차 안과 잔해 근처에서 핏자국이 발견되었으나 , 실종된 잭슨 모자의 다른 흔적 은 없었다. 교외에 사는 주민들은 사고가 난 시각,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잭슨 씨의 남편인 가브 우글리아노는 의붓아들인 퍼시 잭슨이 수많은 기숙학 교에서 쫓겨난 문제아였으며, 과거에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경찰은 아들인 퍼시가 어머니의 실종에 대한 용의자인지 여부를 밝히지 않았 지만, 범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아래는 샐리 잭슨과 퍼시의 최근 사 진이다. 경찰은 정보를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다음의 범죄 방지 운동 무료 직통 번호로 전화하기를 촉구한다. 전화번호에 검은색 마커로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신문을 뭉쳐서 던져 버린 다음, 텅 빈 숙소 한가운데 놓인 침대에 드러누 워서 비참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소등.” 그날 밤, 이제까지 꿈 중에 제일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나는 폭풍우가 치는 해변을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 뒤쪽으로 도시가 있었 는데, 뉴욕이 아니었다. 뻗어 나간 형태가 달랐다. 건물이 훨씬 널찍하게 퍼져 있었고, 멀리 야자나무와 낮은 능선이 보였다. 파도 쪽으로 백여 미터 아래에서 두 남자가 싸우고 있었다. TV 에 나오는 레슬 링 선수같이 근육질에 수염과 머리를 길게 기른 모습이었다. 둘 다 그리스 튜닉 (허리 밑까지 내려와 띠를 두르는 낙낙한 상의) 자락을 휘날리고 있었는데, 하 나는 가장자리가 파란색이었고 하나는 녹색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부여잡고 뒹굴고 걷어차고 박치기를 했으며, 둘이 부딪힐 때마다 번개가 치고 하늘이 어 두워지고 바람이 일었다.
그들을 말려야 했다.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뛰면 뛸수록 바람이 더 거세게 나를 뒷걸음질하게 만들었고, 어디쯤에 이르러서 내 발은 무력하게 모래 속에 묻혀 버렸다. 요란한 폭풍우 너머로 파란 옷의 남자가 녹색 옷을 입은 남자에게 외치는 소리 가 들렸다. ‘돌려 줘! 돌려 줘!’ 마치 장난감을 두고 싸우는 유치원생 같았다. 파도가 점점 거세지며 해변을 때리고 나에게 소금기를 뿌렸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그만둬요! 그만 싸워요!’ 땅이 흔들렸다. 땅속 어딘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깊 고 사악해서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낮게 노래했다. ‘내려오너라. 작은 영웅이여. 내려오너라!’ 내 발밑에서 모래가 갈라지더니 지구 중심부로 통하는 균열이 열렸다. 발이 미 끄러졌고, 암흑이 나를 삼켰다. 나는 떨어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깨어났다. 눈을 떴을 땐 여전히 3 번 숙소에 누워 있었다. 내 몸은 지금이 아침이라고 말 했지만 밖은 어두웠고, 언덕 사이로 천둥이 울렸다. 폭풍이 불고 있었다. 폭풍 은 꿈이 아니었던 셈이다. 문 앞에서 다가닥거리며 문지방을 두드리는 발굽 소리가 들렸다. “네?” 그로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미스터 D 가 보자고 하셔.” “왜?” “미스터 D 는 죽이고 싶…… 음, 직접 듣는 편이 낫겠다.” 커다란 말썽에 휘말린 게 분명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옷 을 입고 그로버를 따라갔다. 며칠 동안 저택에 불려 가기를 반쯤 기대하고 있었다. 이제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되는 빅 3 중 하나인 포세이돈의 아들로 판명되고 나니, 내가 살아 있는 것만 으로도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신들이 내 존재를 벌할 최선의 방법을 의 논하고, 이제 미스터 D 가 그 판결을 전달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롱아일랜드 해협 위 하늘은 막 끓어오르려는 잉크 수프 같았다. 비를 가득 머 금은 구름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로버에게 우산이 필요할지 물었다. “아냐. 우리가 원하지 않는 한 이곳에 비가 내리는 일은 없어.” 나는 폭풍을 가리켰다. “그럼 저건 뭐야?” 그로버는 불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나갈 거야. 나쁜 날씨는 늘 그래.” 나는 그로버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 있는 일주일 동안 흐린 날 은 하루도 없었다. 몇 번 보지 못한 비구름도 계곡 가장자리에만 걸쳐져 있었 다. 그러나 이 폭풍은…… 이건 정말 거대한 폭풍이었다. 배구장에서는 아폴로 아이들이 사티로스들을 상대로 아침 시합을 벌이고 있 었다. 디오니소스의 쌍둥이는 딸기 밭을 거닐며 식물을 키우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 긴장한 듯 보였다. 다들 폭풍을 살피고 있었다.
그로버와 나는 저택 정면 베란다로 걸어 올라갔다. 디오니소스는 내가 온 첫날 과 똑같이 호랑이 무늬가 새겨진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다이어트 콜라를 마시 면서 피노클레 탁자에 앉아 있었다. 가짜 휠체어에 탄 키론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수를 상대로 하고 있었다. 카드들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미스터 D 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여어, 우리 꼬마 유명 인사 오셨나.” 나는 기다렸다. “가까이 와라. 참, 네 애비가 늙은 따개비 수염이란 이유만으로 내가 머리를 조 아릴 거란 기대는 말아라.” 구름 사이로 거미줄처럼 번개가 번득였다. 천둥 소리에 창문이 우르르 흔들렸 다. 디오니소스가 말했다. “재잘재잘 말도 많으셔.” 키론은 피노클레 카드에 관심을 기울이는 척했다. 그로버는 난간 옆에 움츠리 고 서서 발굽을 앞뒤로 다각거렸다. 디오니소스가 말했다. “내 방식대로라면 네 세포를 불태워 버렸을 거다. 그 다음에 재를 쓸어 내고 나 면 숱한 말썽이 사라지겠지. 하지만 키론은 그게 이 저주받은 캠프에서 내가 맡 은 직무를 저버리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너희 작은 망나니들을 해악 으로부터 지켜 주는 임무 말이야.” 키론이 끼어들었다. “자연 발화도 해악의 일종입니다, 미스터 D.” “말도 안 돼. 사내아이들은 아무것도 못 느낀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 제하기로 했다. 대신 너를 돌고래로 바꿔서 네 애비에게 돌려보낼까 생각하고 있다만.” “미스터 D!” 키론이 경고조로 입을 열자 디오니소스는 누그러들었다 . “아, 좋아. 한 가지 선택 사항이 더 있다. 하지만, 끔찍이도 바보 같은 길이야.” 디오니소스가 일어서자 보이지 않는 상대들의 카드가 탁자 위로 떨어져 내렸 다. “난 긴급회의 때문에 올림포스에 간다. 돌아왔을 때도 녀석이 여기에 있으면 내가 손수 병코돌고래로 만들어 버릴 작정이야. 이해했나? 그리고 페르세우스 잭슨, 네가 조금이라도 머리를 쓸 줄 안다면, 돌고래가 되는 편이 키론이 네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쪽보다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점을 알 게 다.” 디오니소스가 카드를 한 장 집어 들고 비틀자 플라스틱 사각형으로 변했다. 신 용카드? 아니, 보안 패스였다. 그는 손가락을 딱 울렸다. 미스터 D 주위의 공기가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그는 홀로그램이 되었다가 바 람이 되더니, 갓 짜낸 포도 냄새만 남기고 사라졌다. 키론이 나를 향해 웃어 보였지만, 지치고 긴장한 기색은 감춰지지 않았다. “앉아라, 퍼시. 그로버도.” 우리는 그대로 했다. 키론은 써 보지도 않은 승리 패를 탁자에 내려놓고 말했다. “말해 봐라, 퍼시. 지옥견은 어땠지?”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키론은 내가 ‘나참, 별것도 아니었어요. 지옥견쯤은 아침거리도 안 돼요’라고 말하길 바랐는지도 모르지만, 거짓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무서웠어요. 선생님이 쏘지 않았다면 전 죽었을 거예요.” “퍼시, 넌 그보다 더 지독한 것들을 만나게 될 게다. 끝나기 전에 훨씬 더 지독 한 것을 보게 될 거야.” “끝나다니…… 뭐가요?” “물론 네 탐색 말이다. 받아들이겠니 ?” 나는 손가락을 꼬고 있는 그로버를 흘끗 보았다. “음, 선생님. 무슨 탐색인지 아직 말씀을 안 해 주셨는데요.” 키론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 그게 어려운 부분이지. 세부 사항들.” 천둥소리가 계곡을 흔들었다. 이제 먹구름이 해변가에 다다라 있었다. 내 눈에 는 하늘과 바다가 함께 끓어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포세이돈과 제우스가 뭔가 귀중한 것, 도난당한 것을 두고 싸우고 있는 거죠, 맞죠?” 내 말에 키론과 그로버는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키론이 휠체어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괜히 입을 놀렸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꼭 바다와 하늘이 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날씨가 이상했 어요. 아나베스와도 이야기해 봤더니 도난당한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우 연히 들었다고 했고요. 그리고 제가 꾼 꿈이 있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로버가 말했다. “조용히, 사티로스여.” 키론의 명령에 그로버는 흥분으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건 퍼시의 탐색이에요! 그래야 한다고요!” “그 문제는 오러클만이 결정할 수 있다.” 키론은 억센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해도 퍼시, 네 말이 옳다. 네 아버지와 제우스는 수백 년 사이에 제일 심하게 싸우는 중이야. 도난당한 귀중품을 두고 싸우고 있지. 정확히 말하면 번 개 화살을 두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뭐요?” “가벼이 받아들이지 마라. 난 2 학년 연극에서 보는 포일에 싼 지그재그 형태의 물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최상급 천계 청동으로 만들어 양쪽 끝에 신 형 폭발물을 씌운 60 센티미터 길이의 원통에 대해 말하는 거지.” “아.” “제우스의 화살.” 키론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제우스가 지닌 힘의 상징이며, 다른 모든 번갯불이 이 화살을 본떠 만들어지 지. 티탄족과의 전쟁을 위해 키클롭스가 만든 첫 번째 무기, 에트나 산 위로 날 아가서 크로노스를 옥좌에서 내팽개친 바로 그 화살. 인간의 수소 폭탄이 폭죽 쯤으로 보일 만한 힘으로 채워진 번갯불.” “그런데 그게 없어졌다고요?” “도난당했지.” “누가요?” “‘누구에게’라고 물어야지.” 키론은 내 질문을 바로잡았다. 한 번 교사면 영원히 교사인 법. “너에게.” 내 입이 쩍 벌어졌다. 키론이 한 손을 들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제우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지난번 신들의 회의가 있었던 동지 때 제우스와 포세이돈은 말싸움을 했어. 늘 그렇듯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 ‘어 머니 레아는 언제나 널 제일 좋아했어.’ ‘하늘의 재앙이 바다의 재앙보다 훨씬 볼 만하다고.’ 등등 한참을 떠들어 댔어. 그러고 나서 제우스는 자기 번갯불이 없어진 것을 알았지. 알현실에서, 그것도 자기 코앞에서 말이야. 제우스는 즉시 포세이돈을 비난했어. 어떤 신이 다른 신이 지닌 힘의 상징물을 직접 빼앗는 것 은 가장 오래된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그러나 제우스는 네 아버지가 인간 영 웅을 시켜서 가져갔을 거라고 믿고 있단다.” “하지만 전…….” “참고 들어 보거라. 제우스에겐 의심할 이유가 충분해. 키클롭스의 대장간은 바다 밑에 있고, 따라서 포세이돈은 형제의 번개를 만든 장인에게 영향력을 행 사하고 있지. 제우스는 포세이돈이 번개 화살을 가져갔고, 지금 비밀리에 키클 롭스를 시켜서 불법 복제 공장을 짓고 있으며, 그 무기들은 제우스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쓰일 거라고 믿고 있다. 제우스가 확신하지 못한 것은 오직 포세 이돈이 어떤 영웅을 이용해서 화살을 훔쳤는가 하는 점이었어. 이제 포세이돈 이 공공연하게 너를 아들로 인정했다. 넌 겨울 방학 내내 뉴욕에 있었으니 쉽게 올림포스에 숨어들 수 있었겠지. 제우스는 마침내 도둑을 찾았다고 믿고 있단 다.” “하지만 전 올림포스에 가 본 적도 없어요! 제우스가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 키론과 그로버는 불안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구름은 그로버가 말한 대로 갈 라져서 지나쳐 갈 것 같지 않았다. 구름은 계곡 바로 위로 몰려와서 관 뚜껑처 럼 우리를 감쌌다. 그로버가 말했다. “퍼시, 우린 하늘의 지배자를 말할 때 그런 표현은 쓰지 않아.” 키론이 대안을 제시했다. “편집증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지. 그러나 포세이돈은 전에도 제우스를 끌어 내리려 한 적이 있다. 네 마지막 시험에서 38 번 문제였던 것 같다만…….” 키론은 진심으로 내가 38 번 문제를 기억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어떻게 내가 신의 무기를 훔쳤다는 비난을 들을 수가 있지? 나는 가브의 포커 파티에서 들키지 않고 피자 한 조각 훔치는 재주도 없었다. 키론은 답을 기다리 고 있었다. “금으로 만든 그물 이야기요? 포세이돈과 헤라와 다른 신들 몇이서…… 제우 스를 함정에 빠뜨린 다음 더 좋은 통치자가 되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풀어 주지 않았죠?”
“맞다. 그리고 제우스는 그 후로 포세이돈을 믿지 않았지. 물론 포세이돈은 번 개 화살을 훔쳤다는 비난을 부인하고 있어. 그 비난을 대단히 모욕적으로 받아 들였지. 둘은 몇 달 동안 전쟁 위협을 던지면서 결론 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어. 그런데 이제 네가 나타난 거야. 마지막 퍼즐 조각이.” “하지만 전 어린애일 뿐이에요!” 그로버가 끼어들었다. “퍼시, 네가 제우스고 이미 네 형제가 너를 타도할 계획을 짜고 있다고 생각한 다면, 그런데 그 형제가 갑자기 2
차 세계대전 이후에 한 성스러운 맹세를 깨고 제우스인 너를 상대로 무기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인간 영웅의
아버지가 되었음 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해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니?” “하지만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포세이돈이, 내 아버지가 정말로 번개 화살 을 훔친 건 아니지? 아니죠?” 키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있는 이들은 대부분 도둑질은 포세이돈의 스타일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 다. 그러나 바다 신은 너무 자존심이 강해서 제우스를 설득하려 들지 않아. 제 우스는 포세이돈에게 하지 때까지 화살을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는 6 월 21 일, 지금으로부터 열흘 뒤지. 포세이돈도 그날 도둑으로 몰린 데 대한 사과를 받고 싶어 한단다. 난 외교책이 통해서 헤라와 데메테르와 헤스티아가 두 형제의 이 성을 찾아 주기를 희망하고 있었단다. 그러나 네가 도착한 것이 제우스의 성질 에 불을 붙였어. 이젠 둘 다 물러서지 않을 거야. 누군가가 끼어들지 않으면, 누 군가가 하지 전에 번개 화살을 찾아서 제우스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이 터 질 거야. 전면전이 어떤 건지 아느냐, 퍼시?” “나쁜가요?” “혼돈에 빠진 세상을 상상해 보거라. 전쟁의 본질 그대로. 올림포스 주민들은 제우스와 포세이돈 사이에서 편을 갈라야만 하겠지. 파괴. 대학살. 수백만 명이 죽을 거고, 서구 문명권은 트로이 전쟁쯤은 물 풍선 놀이쯤으로 보일 만큼 큰 전쟁터가 될 거다.” “최악이군요.” “그리고 너, 퍼시 잭슨은 제우스의 분노를 맛볼 첫 번째 타자가 되겠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배구를 하던 아이들이 시합을 멈추고 놀라서 말없이 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 내가 이 폭풍을 반쪽 피 언덕으로 끌고 온 것이다. 제우스는 나 때문에 온 캠프 를 벌주고 있었다. 화가 났다. “그러니까 전 그 바보 같은 화살을 찾아서 제우스에게 돌려줘야겠군요 .” “포세이돈의 아들이 제우스의 소유물을 돌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화해 선물이 있을까?” “포세이돈에게 없다면 그 화살은 어디 있죠?” 키론의 표정은 음울했다. “나는 알 것 같다만. 내가 몇 년 전에 들은 예언의 일부가…… 흠, 이제 그 중 몇 줄이 이해가 간다. 그러나 더 이야기하기 전에 너는 공식적으로 탐색의 사명 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러클의 조언을 구해야 해.” “왜 그 전에 화살이 어디 있는지 말해 줄 수 없는 건데요?” “그랬다간 네가 너무 겁을 먹어서 도전을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좋은 이유네요.” “그러면 동의하느냐?” 그로버를 보니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로버에게야 쉽겠지. 제우스가 죽이고 싶어 하는 건 나니까. “알았어요. 돌고래가 되는 것보다야 낫겠죠.” “그렇다면 오러클을 찾을 시간이다. 위층으로, 다락방으로 올라가라, 퍼시 잭 슨. 네가 내려왔을 때 아직 제정신이라면 그때 더 얘기하자꾸나 .” 계단은 4 층을 올라가 녹색 뚜껑 문 아래에서 끝났다. 뚜껑 문을 잡아당겼다. 문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덜컹, 나무 사다리가 떨어졌 다. 위로부터 훅 끼치는 더운 공기에서 곰팡내와 썩은 나무 냄새와 생물 수업 시간 에 맡아 본 냄새가 났다. 파충류 냄새. 뱀 냄새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올라갔다. 다락방은 그리스 영웅들의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거미줄에 뒤덮인 갑옷 걸이, 한때는 반짝였겠지만 지금은 녹슬어 구멍이 뚫린 방패들, ‘이타카’니 ‘키르케 의 섬’이니 ‘아마존의 땅’이니 하는 스티커가 붙은 낡은 가죽 트렁크들. 기다란 탁자 하나에는 잘려 나간 털투성이 발이며 커다란 노란색 눈, 그 밖에도 괴물들 의 다양한 부위를 절여서 담아 놓은 유리 단지가 즐비했다. 벽에 붙박인 먼지투 성이 전리품은 거대한 뱀의 머리처럼 보였지만, 상어 이빨에 뿔까지 달려 있었 다. 명판에는 ‘히드라 머리 1 번, 뉴욕 우드스톡, 1969’라고 적혀 있었다. 가장 소름끼치는 기념물은 창가에 놓인 세발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미라였 다. 천을 둘둘 만 미라가 아니라, 오그라들어 뼈와 가죽만 남은 여자 시체였다. 홀치기 염색을 한 여름 치마를 입고 구슬이 잔뜩 달린 목걸이를 했으며, 긴 검 은 머리에 머리띠를 둘렀다. 얼굴은 두개골 위에 얇은 가죽처럼 피부를 씌운 것 같았고, 눈은 진짜 눈이 구슬로 교체된 것처럼 흐리멍덩한 흰 구멍이었다. 죽은 지 아주 오래된 시체였다. 그 여자를 보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그건 여자가 몸을 세우고 앉아서 입을 열기 전의 일이었다. 미라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녹색 안개가 굵은 덩굴손 모양으로 바닥 위를 구불거리며 2 천 마리 뱀 떼처럼 쉭쉭거렸다. 나는 허둥대 며 뚜껑 문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문은 쾅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머릿속에서 목 소리가 들렸다. 한쪽 귀로 미끄러져 들어와서 뇌에 감기는 목소리였다. ‘나는 델피의 혼, 강대한 파이톤을 처치한 포에보스 아폴론의 신탁자니라. 구 하는 자여, 다가와서 물으라.’ 나는 ‘괜찮아요. 화장실을 찾고 있었는데, 잘못 들어왔네요.’라고 말하고 싶었 다. 하지만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 미라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무엇…… 지금 녹색 안개가 되어 내 주 위에 소용돌이치는 힘이 담긴 기분 나쁜 그릇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존재는 마귀 수학 교사인 도즈 선생이나 미노타우로스처럼 사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 다. 그보다는 고속도로 과일 가게에서 본, 털실로 양말을 뜨고 있던 운명의 세 여신 같은 느낌이었다. 오래되었고 강력하고 인간과 거리가 멀지만, 특별히 나 를 죽이는 데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내 운명은 뭐죠?” 안개가 더 짙게 소용돌이치며 내 앞, 단지 안에 절여 놓은 괴물들이 담긴 탁자 주위로 모여들었다. 갑자기 탁자 주위에 카드놀이 중인 남자 넷이 나타났다. 얼 굴이 뚜렷해졌다. 구린내 가브와 그 친구들이었다 . 이 포커 파티가 실제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 은 안개로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가브가 내 쪽을 보고 귀에 거슬리는 오러클의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서쪽으로 가서, 배반한 신과 마주할 것이다.’ 오른쪽에 앉은 작자가 눈을 들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도난당한 것을 찾고, 그것이 안전하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다.’ 왼쪽에 앉은 남자가 포커 칩을 두 개 던지면서 말했다. ‘너는 너를 친구라 부르는 자에게 배신당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건물 관리인인 에디가 제일 나쁜 예언을 읊었다. ‘그리고 너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을 구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네 사람의 모습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어리벙벙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안개가 걷히면서 거대한 녹색 뱀으로 똬리를 틀었다가 미라의 입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이렇게 외쳤다. “잠깐! 무슨 뜻이에요? 어떤 친구요? 내가 뭘 구하는 데 실패하는데요?” 안개 뱀의 꼬리가 미라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여자는 다시 벽에 몸을 기댔다. 입은 백 년 동안 열린 적이 없었던 것처럼 꽉 다물렸다. 다락방은 다시 조용해 졌고, 버려졌으며, 기념물이 가득한 방에 불과했다. 거미줄투성이가 될 때까지 여기 서 있는다 해도 더 이상은 아무것도 알 수 없 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오러클과의 공식 접견은 끝났다. “그러면?” 키론이 물었다. 나는 피노클레 탁자 앞 의자에 주저앉았다. “도난당한 것을 되찾을 거랬어요.” 그로버가 남아 있는 다이어트 콜라 캔을 신나게 씹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멋지다!” 키론이 재촉했다. “오러클이 정확히 뭐라고 했지? 중요한 문제다.” 뱀 같은 목소리 덕에 아직도 귀가 얼얼했다. “오러클…… 오러클 말이 서쪽으로 가서 배반한 신을 마주할 거래요. 도난당 한 것을 찾고 안전하게 제자리에 돌아가는 것을 볼 거고요.” “그럴 줄 알았어.” 그로버는 그렇게 말했지만 키론은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 외에는?” 나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친구가 나를 배신하는 걸까? 나에겐 친구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예언도. 가장 중요한 것을 구하는 데 실패할 거라는 예언도. 대 체 무슨 예언자가 탐색을 내보내면서 ‘아, 그런데 넌 실패할 거야.’라고 말한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그 내용을 털어놓을 수 있었겠는가? “아뇨. 그게 다예요.” 그 말에 키론은 내 얼굴을 살폈다. “좋다, 퍼시. 그러나 이건 알아 둬라. 오러클의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닐 때 가 많단다. 그 말을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라. 진실은 언제나 사건이 일어난 다 음에야 명확해지는 법이다.” 내가 뭔가 나쁜 내용을 숨기고 있음을 알고 기운을 북돋워 주려는 것 같았다. 나는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좋아요. 그러면 어디로 가죠? 서쪽에 있다는 신이 누구죠?” “아, 생각을 해라, 퍼시. 제우스와 포세이돈이 전쟁을 벌여 서로를 약하게 만들 면 누가 이익을 얻을까?” “권력을 쥐고 싶어 하는 다른 누군가요?” “바로 그렇지. 탐욕을 품은 누군가, 오래전에 세계가 나뉜 다음부터 자기 추첨 운에 기분이 상한 장본인, 수백만의 죽음으로 그 왕국이 더 강력해질 바로 그 누군가지.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억지 맹세를 시켜 놓고 자기들은 그 맹세를 깬 형제들을 미워하는 누군가란 말이다.” 나는 꿈에 대해, 땅밑에서 울리던 사악한 목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하데스군요.” 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후보는 죽음의 왕뿐이야.” 그로버의 입에서 알루미늄 조각이 떨어졌다. “워어, 잠깐만요. 뭐, 뭐라고요?” 키론이 그로버의 기억을 일깨웠다. “푸리아이가 퍼시를 쫓아왔었지. 푸리아이는 퍼시의 정체에 확신이 설 때까지 지켜보다가 죽이려고 했어. 푸리아이들은 오직 한 명의 지배자에게만 복종하 지. 하데스에게만.” 그로버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야 그렇지만, 하데스는 모든 영웅을 다 싫어하잖아요. 특히나 퍼시가 포세 이돈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다면…….” 키론이 말을 이었다. “지옥견이 숲 속에 들어왔었지. 지옥견은 형벌의 들판으로부터만 불러올 수 있고. 캠프 안의 누군가가 불러들인 게 분명해. 하데스가 이곳에 첩자를 두고 있는 게 틀림없어. 필시 포세이돈이 퍼시를 이용해서 누명을 씻으려 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데스는 퍼시가 탐색에 나서기 전에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 았을 거야.” 나는 중얼거렸다. “멋지네요.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거물 신이 둘이나 되다니.” “하지만 탐색을…….” 그로버가 침을 삼켰다. “화살이 메인 주 같은 곳에 있을 가능성은 없나요? 메인 주는 이맘때쯤 굉장히 좋은데.”
키론이 단언했다. “하데스가 앞잡이를 보내서 번개 화살을 훔친 거야. 그리고 제우스가 포세이 돈을 비난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지하 세계에 감췄지. 죽은 자들의 왕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왜 지금 시기를 택해서 전쟁을 시작하려고 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한다고는 못하겠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퍼시가 지하 세계에 가서 번개 화살을 찾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 배 속에 이상한 불길이 타올랐다. 제일 이상한 점은, 그게 두려움이 아니었다 는 사실이다. 그건 기대감이었다 . 복수에 대한 열망이었다. 하데스는 이제까지 세 번이나 나를 죽이려 했다. 푸리아이로, 미노타우로스로, 지옥견으로. 어머니 가 섬광 속으로 사라진 것도 하데스 탓이었다. 이제 그는 나와 아버지에게 저지 르지도 않은 도둑질 누명을 씌우려 하고 있다. 나는 하데스와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지하 세계에 있다면……. 내 뇌에서 아직 제정신인 작은 부분이 말했다. ‘어이 어이, 넌 어린애고 하데스 는 신이야.’ 그로버는 덜덜 떨고 있었다. 녀석은 카드를 감자 칩처럼 먹어 치우기 시작했 다. 불쌍한 그로버는 나와 같이 탐색을 완수해야만 수색자 자격증이라는 것을 받 을 수 있지만, 내가 어떻게 이 탐색여행을 같이 가자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오러클에게 실패할 운명이라는 말을 들어 놓고서. 이건 자살 행위였다. 나는 키론에게 말했다. “저기요, 하데스 짓이라는 걸 안다면 왜 그냥 다른 신들에게 말해 버리면 안 돼 요? 제우스나 포세이돈이 지하 세계로 내려가서 머리를 몇 개 날려 버릴 수도 있잖아요.” 키론이 대답했다. “의심하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게다가 다른 신들이 하데스를 의심한 다 해도…… 내가 보기엔 포세이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만, 그렇다 해도 직 접 화살을 되찾아 올 수는 없어. 신들은 초대를 받지 않는 한 다른 신의 영역에 넘어갈 수 없단다. 이것도 아주 오래된 규칙이지. 반면 영웅들에게는 특권이 있 다. 충분한 배짱과 힘만 있다면 어디든 가서 누구에게나 도전할 수 있지. 어떤 신도 영웅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순 없어. 왜 신들이 늘 인간을 통해 일한다고 생 각하느냐?” “그 말씀은 제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거네요.” “포세이돈이 지금 너를 인정한 건 우연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이건 아주 위험한 도박이지만, 포세이돈은 절박한 상황이야. 그는 너를 필요로 해.” 아빠가 나를 필요로 한다. 만화경 안에 든 유리 조각들처럼 내 속에서 여러 감정이 넘실거렸다. 나는 분 개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 포세이돈 은 12 년 동안 나를 무시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나를 필요로 한다. 나는 키론을 보았다. “내내 제가 포세이돈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계셨던 거죠?” “의심은 하고 있었지. 말했듯이…… 나 또한 오러클과 이야기를 해 보았단 다.” 나는 키론이 그 예언에 대해 감추는 것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은 그 문제로 고민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나 역시 정보를 감추고 있지 않 은가. “그러면 분명히 정리해 보죠. 전 지하 세계에 가서 죽은 자들의 왕과 대면해 요.”
“그래.” “우주에서 제일 강력한 무기를 찾고요.” “그래.” “그리고 하지가 오기 전, 그러니까 열흘 안에 올림포스에 돌려 놔요.” “맞는 것 같구나.” 나는 하트 에이스를 삼키고 있는 그로버를 보았다. 그로버는 약한 목소리로 말 했다. “메인 주가 이맘때쯤 굉장히 좋다는 얘기 했던가?” “넌 안 가도 돼. 그런 부탁을 할 순 없지.” “어…….” 그로버는 발굽을 들어 올렸다. “아냐, 그냥 사티로스랑 지하 세계는…… 음…….” 그로버는 깊이 심호흡을 하더니 일어서서 카드 조각과 알루미늄 조각을 티셔 츠에서 털어 냈다. “넌 내 목숨을 구해 줬어, 퍼시. 만약에 네가 진심으로 나랑 같이 가고 싶어 한 다면, 널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너무나 마음이 놓인 나머지 울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건 그렇게 영웅다운 행동 이 아닐 것 같았다. 그로버는 내가 몇 달 이상 사귄 유일한 친구였다. 사티로스 가 죽은 자들의 군세에 대항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로버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졌다. “물론이지. 물론 원하고 말고.” 나는 키론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해요? 오러클은 서쪽이라고만 했는데요.” “지하 세계로 가는 입구는 언제나 서쪽에 있지. 올림포스와 마찬가지로 시대 에 따라 이동하고. 지금은 물론 미국에 있다.” “어디요?” 키론은 놀란 얼굴이었다. “그만하면 명백하지 않으냐. 지하 세계 입구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단다.” “오, 당연히 그렇겠죠. 그러면 비행기를 타고…….” 그로버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안 돼! 퍼시,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제까지 비행기 타 본 적 있어?”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한 번도 나를 비행기에 태운 적이 없었 다. 언제나 그럴 돈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비행기 사 고로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거라, 퍼시. 넌 바다 신의 아들이야. 네 아버지는 하늘의 왕인 제우 스의 제일 강력한 라이벌이지. 네 어머니는 비행기를 믿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거야. 비행기를 타면 제우스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니까 말이다. 다 시는 살아서 내려오지 못하겠지.” 머리 위에서 벼락이 쳤다. 천둥소리도 울렸다. 나는 폭풍을 보지 않기로 마음먹고 말했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땅으로 가야겠군요.”
“그렇다. 두 사람이 동행할 거야. 하나는 그로버고, 또 하나는 이미 자원했다. 네가 그 애의 도움을 받아들인다면 .” 나는 놀란 척하며 말했다. “대체 또 누가 이런 모험에 자원할 만큼 멍청하대요?” 키론 뒤쪽으로 공기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아나베스가 양키스 모자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난 탐색 여행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거든, 해초 머리. 아테나는 포세이돈의 지 지자가 아니지만, 네가 세상을 구할 거라면 일을 망치지 않게 돕는 데 내가 최 고 적임자겠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뭔가 계획이 있겠지, 현명한 아가씨?” 아나베스의 뺨이 붉어졌다. “내 도움 받을래, 안 받을래?” 솔직히 말하자면, 원했다. 나는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이 필요했다. “삼총사면 좋지.” 내 말에 키론이 말했다. “아주 잘됐구나. 오늘 오후에 맨해튼에 있는 버스 터미널까지 바래다 줄 수 있 을 게다. 그 다음에는 너희가 알아서 가야 해.” 번개가 번쩍였다. 궂은 날씨를 경험하지 않아도 될 풀숲 위로 비가 쏟아졌다. 키론이 말했다. “허비할 시간이 없다. 다들 짐을 싸야 할 것 같구나.” 제 10 장 첫 번째 습격 짐을 싸는 일은 금세 끝났다. 미노타우로스의 뿔을 숙소에 두고 가기로 결정하 자 그로버가 찾아다 준 배낭에 넣을 짐이라곤 옷 한 벌과 칫솔 하나뿐이었다. 캠프 창고에서는 나에게 인간 돈 백 달러와 드라크마 금화 20 닢을 빌려 주었 다. 드라크마 금화는 걸스카우트 쿠키만큼 컸는데, 한쪽 면에는 다양한 그리스 신의 모습이, 반대쪽 면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찍혀 있었다. 키론은 고 대인들이 사용한 드라크마는 은화였으나 올림포스 주민들은 순금이 아니면 사 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드라크마 금화가 비인간 거래에 유용할 수 있다고 했는 데 무슨 뜻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또 키론은 긴급할 때만, 그러니까 심하게 다 쳤을 때만 먹으라고 아나베스와 나에게 각각 넥타르 한 깡통과 암브로시아가 꽉 찬 지퍼 백 하나씩을 줬다. 키론은 그것이 신들의 음식임을 일깨워 주었다. 거의 모든 상처를 치료해 주지만, 인간에게는 치명적이었다 . 너무 많이 먹으면 반쪽 피도 심하게 열이 오르고, 더 심하면 말 그대로 타 버린다고 했다. 아나베스는 마법의 양키스 모자를 챙겼는데, 엄마에게 열두 살 생일 선물로 받 은 물건이라고 했다. 아나베스는 지루할 때 읽겠다고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유 명한 고전 건축에 대한 책도 한 권 넣었고, 셔츠 소매에는 길쭉한 청동 단검을 숨겼다. 금속 탐지기를 통과할 일이 생긴다면 제일 먼저 그 단검 때문에 체포될 게 분명하다. 그로버는 인간 행세를 위해 바지를 입고 가짜 발을 신었다. 비라도 와서 곱슬 머리가 주저앉았다간 뿔 끄트머리가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녹색 라스타 스타일 모자도 썼다. 밝은 오렌지색 배낭에는 간식으로 먹을 사과와 금속 조각이 가득
했다. 주머니에는 아빠 염소가 깎아 준 갈대 피리 한 벌이 들어 있었다. 그로버 가 아는 노래라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12 번과 힐러리 더프의 ‘쏘우 예스 터데이’뿐이었다 . 갈대 피리로 불면 두 곡 모두 아주 끔찍한 소리가 나긴 했지 만 말이다. 우리는 캠프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마지막으로 딸기 밭과 바다와 저택을 바 라본 다음, 한때는 제우스의 딸 탈리아였던 키 큰 소나무가 서 있는 반쪽 피 언 덕에 올랐다. 휠체어에 탄 키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병실에서 회복 중이었 을 때 보았던 파도타기 선수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로버 말로는 그 남자가 캠프의 보안 책임자라고 했다. 그는 온몸에 눈이 달렸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놀 라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운전사 제복을 입고 있어서 손과 얼굴과 목에 있는 눈 몇 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키론이 말했다. “이쪽은 아르고스다. 너희들을 시내까지 태워다 주고, 상황을 살펴볼 거다.”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루크가 농구화를 들고 언덕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루크는 헐떡이며 말했다. “어이! 다행이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 아나베스는 루크가 주위에 있으면 늘 그랬듯 이번에도 얼굴을 붉혔다. “행운을 빌어 주고 싶었어. 그리고 혹시…… 음, 어쩌면 이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루크는 나에게 농구화를 건넸다. 보기에도 아주 평범했고, 냄새마저도 평범했 다. 루크가 말했다. “마이아!” 순간 발꿈치에서 하얀 날개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신발을 떨어 뜨렸다. 신발은 날개가 접혀 사라질 때까지 퍼덕이며 땅 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로버가 외쳤다. “끝내 준다!” 루크는 빙긋 웃었다. “내가 탐색 때 잘 써먹은 물건이야. 아빠에게 받은 선물이지. 물론 요즘에는 별 로 쓰지 않지만…….” 루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루크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와 준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최근 며칠 동안 내가 너무 많은 관심을 끌어서 루크가 화를 내고 있진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법 선물까지 가져오 다니…… 나는 거의 아나베스만큼이나 얼굴이 붉어졌다. “고마워, 친구.” 루크는 불편한 기색이었다. “있지, 퍼시. 네게 많은 희망이 걸려 있어. 그러니까 그냥…… 날 위해 괴물 몇 마리만 죽여 줘. 알았지?” 우리는 악수를 했다. 루크는 그로버의 머리에 난 뿔 사이를 토닥인 다음, 아나 베스와 작별 포옹을 나눴다. 아나베스는 거의 기절할 듯 보였다. 루크가 간 다음 나는 아나베스에게 말했다. “너 호흡이 너무 빠른 거 아니니?” “아니야.”
“네가 직접 안 하고 루크가 깃발을 잡게 했었지?” “오, 내가 왜 너랑 같이 가려고 하나 몰라!” 아나베스는 언덕 아래 갓길에서 기다리고 있는 밴 자동차를 향 해 달려 내려갔 다. 아르고스가 자동차 열쇠를 짤랑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날아다니는 신발을 집어 들다가 문득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그래서 키론 을 돌아보며 물었다. “전 이 신발을 쓸 수 없겠죠?” 키론은 고개를 저었다. “루크는 좋은 뜻으로 준 거다, 퍼시. 그렇지만 허공에 떠오르는 건…… 너에게 는 별로 현명한 일이 아니겠지.” 나는 실망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이, 그로버. 마법 물건 써 볼래?” 그로버의 눈이 반짝였다. “나?” 잠시 후 우리는 그로버의 가짜 발에 신긴 농구화 끈을 묶었고, 세계 최초의 비 행 염소 소년은 이륙 준비를 마쳤다. 그로버가 외쳤다. “마이아!” 이륙은 잘 했지만, 곧 옆으로 넘어져서는 배낭이 풀숲에 질질 끌렸다. 날개 달 린 신발은 작은 야생마처럼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키론이 그로버 뒤에 대고 외 쳤다. “연습을 하게나! 연습만 하면 될 게야!” “으아아악!” 그로버는 신들린 잔디 깎는 기계처럼 비스듬히 날면서 밴 자동차를 향해 내려 갔다. 그 뒤를 따라가려는데 키론이 내 팔을 잡았다. “널 좀 더 훈련시켰어야 했는데.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 헤라클레스, 이아 손, 그 아이들은 훈련을 더 받았단다.” “괜찮아요. 전 그저…….” 나는 내 목소리가 어린애처럼 들리기 전에 입을 다물었다. 우리 아빠도 탐색에 도움이 될 만한 멋진 마법 물품을, 루크의 날개 달린 신발이나 아나베스의 투명 해지는 모자 같은 물건을 줬으면 싶었다. 키론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이것도 없이 보낼 순 없지.” 키론은 외투 주머니에서 펜을 하나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검은색에 뚜껑이 달 린 평범한 1 회용 볼펜이었다. 30
센트쯤 할까.
“이런, 고맙습니다.” “퍼시, 이건 네 아버지가 주는 선물이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너라는 사실도 모르면서 보관해 왔지. 그러나 이제 예언이 명확하게 이해가 되는구나. 네가 바 로 그 사람이야.” 나는 도즈 선생을 먼지로 만들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견학을 떠올렸다. 키
론이 던져 준 펜이 검으로 변했었다. 이 펜이 혹시? 뚜껑을 열자 펜이 내 손 안에서 길어지고 무거워졌다. 0.5 초 만에 나는 손잡이 부분을 가죽으로 감싸고 평평한 검자루를 금 못으로 고정시킨 번득이는 양날 청동 검을 들고 있었다. 내 손에 딱 맞는 검은 처음이었다. “그 검에는 길고 비극적인 역사가 있다만,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 이름은 아나 클루스모스다 .” “역조(바람 방향과 반대로 흐르는 조류)로군요.” 나는 고대 그리스어가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것에 놀라며 뜻을 풀이했다. “위급할 때에만 사용하거라. 그리고 오직 괴물을 상대로만 써야 한다. 물론 절 박하게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어떤 영웅도 인간을 해치지 않는 법이지만, 어쨌 든 이 검은 인간을 상하게 하지 않는단다.”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날카로운 검날을 보았다. “인간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검은 천계 청동으로 만든 거란다. 키클롭스가 연마하여 에트나 산 심장부 에서 담금질을 한 다음 레테 강에 식힌 검이지. 괴물이나 지하 세계 생물들에게 는 치명적이야. 그들이 널 먼저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러나 그 칼날은 허상처럼 인간을 통과해 버리지. 인간은 그 칼날에 죽을 만큼 중요하지 않거든. 그리고 경고해 두마. 반인반신이기 때문에 너는 천계의 무기나 보통 무기 양쪽 다에 죽 을 수 있다. 두 배로 불리한 셈이지.” “알게 되니 다행이네요.” “이제 뚜껑을 다시 씌워라.” 펜 뚜껑으로 검 끝을 건드리자 즉시 ‘역조’는 줄어들어 다시 볼펜이 되었다. 나 는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볼펜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학교에서 나는 펜을 잃 어버리기로 유명했다. 키론이 말했다. “그럴 순 없단다.” “뭐가 그럴 수 없어요?” “펜을 잃어버리는 것 말이다. 주문이 걸려 있거든. 언제나 네 주머니에 다시 나 타나지. 시험해 보거라.” 나는 조심스러웠지만 가능한 한 언덕 아래로 멀리 펜을 던졌고, 펜이 풀숲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분 걸릴 수도 있다. 이제 주머니를 확인해 보거라.” 과연 펜은 주머니 안에 있었다. “좋아요, 제법 멋지네요. 그렇지만 제가 검을 뽑는 걸 인간이 보면 어떻게 하 죠?” 키론이 빙긋 웃었다. “‘안개’는 강력하단다, 퍼시.” “‘안개’요?” “그래. 『일리아드』를 읽어 보거라. 안개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하지. 신이나 괴물에게 속하는 요소는 인간 세계와 섞일 때마다 ‘안개’를 발생시키고, 안개 는 인간들의 시야를 가린단다. 반쪽 피인 너는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겠지만, 인간들은 상당히 다르게 해석할 거야. 인간이 어디까지 자기들이 생각하는 현 실에 상황을 끼워 맞출 수 있는지는 우리도 궁금할 정도지.” 나는 ‘역조’를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처음으로 탐색 여행이 실감이 갔다. 나는 정말로 반쪽 피 언덕을 떠나고 있었 다. 감독하는 어른도 없이, 예비 계획도 없이, 심지어 휴대 전화기도 없이─키론 은 괴물들이 휴대 전화기를 추적할 수 있다고 했다. 전화를 쓰는 것이 조명탄을 쏘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것이다─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검보다 강한 무기
도 없이 괴물들과 싸우면서 죽음의 땅에 도착해야 했다. “키론…… 신들이 죽지 않는다는 건…… 그러니까, 신들 이전 시대도 있었잖 아요?” “정확하게는 그 전에 네 시대가 있었지. 티탄족이 지배하던 시기는 네 번째 시 대로, 때로는 황금시대로 불리기도 한다만 그건 확실히 잘못된 명칭이야. 그리 고 지금, 서구 문명과 제우스의 지배기는 다섯 번째 시대지.” “그러면, 신들 이전에는 어땠어요?” 키론은 입술을 오므렸다. “얘야, 나도 그 시절을 기억할 만큼 나이가 많지는 않다만 그래도 인간에게 암 흑과 노예 시절이었다는 건 안단다. 티탄족의 왕 크로노스는 인간이 무지하고 어떤 지식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통치기를 황금시대라고 불렀지. 그러 나 그건 선전 문구에 불과했어. 티탄의 왕은 식사 전 요깃거리나 싸구려 여흥의 양념으로가 아니라면 너희 종족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지. 제우스 왕 통치 초기, 선한 티탄족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었을 때부터 비로소 너희 종족은 진보하기 시작했고, 그 프로메테우스조차도 급진적인 사상가로 낙인찍 혔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엄한 벌을 내렸고. 물 론 결국에는 신들이 인간들에게 너그러워졌고 서구 문명이 탄생했지.” “하지만 지금 신들은 죽을 수 없는 거죠? 그러니까 서구 문명이 살아 있는 한 신들도 살아 있다면서요. 그럼 제가 실패하더라도 모든 것을 망칠 만큼 나쁜 일 이 일어나지는 않겠죠?” 키론은 침울한 미소를 던졌다. “서구 시대가 얼마나 오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퍼시. 그래, 신들은 불사의 존 재지. 그러나 티탄족도 그렇다. 그들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어. 다양한 감옥에 갇혀서 끝없는 고통과 처벌을 감내하며, 힘은 줄어들었을지 모르나 아직도 생 생하게 살아 있지. 운명의 세 여신께서 부디 신들이 그러한 파멸을 맞이하지 않 게 하시기를, 혹은 우리가 과거의 암흑과 혼돈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시기를. 얘 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리 운명에 따르는 것뿐이란다.” “우리 운명을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긴장을 풀고 맑은 정신을 유지해라. 그리고 기억해라, 넌 인간 역사에서 가장 큰 전쟁을 막을 수도 있단다.” “긴장을 풀라고요? 아주 마음이 편하네요.” 나는 언덕 아래로 내려가서 뒤를 돌아보았다. 한때 제우스의 딸 탈리아였던 소 나무 밑에 키론이 반인반마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고 서서 경례하듯 활을 높 이 들고 있었다. 전형적인 켄타우로스의 여름캠프식 배웅이었다. 아르고스가 모는 차는 시골길을 달려서 롱아일랜드 서쪽으로 진입했다. 평범 한 합승객처럼 아나베스와 그로버를 옆에 태우고 다시 고속도로를 달리니 기 분이 이상했다. 반쪽 피 언덕에서 2 주를 보내고 나니 현실 세계가 환상 같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길에 보이는 맥도널드마다 , 부모님 차 뒤에 앉은 아이들 마다, 차를 달리다가 마주하는 광고판과 쇼핑몰마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 다. 나는 아나베스에게 말했다. “아직까진 괜찮네. 15 킬로미터나 왔는데 괴물이 하나도 안 나왔으니.” 아나베스는 짜증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액운을 불러온다고, 해초 머리.” “한 번만 더 알려 줘. 왜 그렇게 날 싫어하는 건데?”
“싫어하지 않아.” “거짓말 마.” 아나베스는 투명 모자를 접었다. “그게 말이지…… 그냥 우린 잘 맞지 않게 되어 있어. 우리 부모님은 경쟁 관 계야.” “왜?” 아나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많은 이유가 필요해? 한번은 우리 엄마가 아테나 신전에서 애인과 같 이 있는 포세이돈을 잡았는데, 신전에서 그러는 건 엄청나게 모욕적인 일이야. 또 언제인가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아테네 시의 후원자가 되겠다고 경쟁을 했 지. 네 아빠는 선물로 바보 같은 소금물 샘을 만들어 줬어. 우리 엄마는 올리브 나무를 만들었어. 사람들은 엄마 선물을 더 마음에 들어 하고는 아테나의 이름 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었지.” “올리브를 진짜 좋아했나 보네.” “아, 관둬.” “너희 어머니가 피자를 발명했다면 그건 나도 이해할 수 있겠어.” “관두라니까!” 앞좌석에 앉은 아르고스가 미소를 지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목덜미에 붙은 푸른 눈 하나가 나에게 눈을 찡긋했다. 퀸즈에 들어서자 교통 정체로 속도가 느려졌다. 맨해튼에 들어섰을 때는 해질 녘이었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르고스는 우리를 엄마와 가브가 살던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이스트사이드 위쪽의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로 데려갔다. 우체통에 내 사진을 박아 놓은 전단지가 흠뻑 젖은 채 붙어 있었다. ‘이 소년을 보셨나요?’ 나는 아나베스와 그로버가 알아차리기 전에 전단지를 뜯어 버렸다. 아르고스는 우리 가방을 내려 주고, 우리가 버스표 사는 것을 확인한 다음 차 를 몰고 떠났다. 그는 주차장을 빠져나가면서 손등에 있는 눈을 열고 우리를 지 켜보았다. 나는 예전 아파트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지금쯤 엄마 는 사탕 가게에서 퇴근해서 집에 와 있을 것이다. 구린내 가브는 지금도 그곳에 서 여전히 엄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포커를 치고 있을 것이다. 그로버가 배낭을 걸머지고 내가 보고 있던 거리 쪽을 내려다보았다 . “어머니가 왜 그 사람과 결혼했는지 알고 싶어, 퍼시?” 나는 그로버를 노려보았다. “내 마음이라도 읽은 거야?” 그로버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감정만이야. 사티로스들이 감정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을 해 준다는 걸 깜박 했군. 엄마와 새 아빠 생각하고 있었지?” 나는 그로버가 어떤 말을 또 깜박했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엄마가 가브와 결혼한 건 널 위해서야. 넌 가브를 ‘구린내’라고 부르고 있지만, 짐작도 못할 거야. 그 남자의 오라는…… 구역질이 나. 여기에서도 맡 을 수 있을 정도거든. 너에게서도 그 사람 흔적을 맡을 수 있어. 네가 그를 본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말이야.”
“그거 고맙네. 제일 가까운 샤워장이 어디야?” “고맙게 생각해야 해, 퍼시. 네 새 아빠가 풍기는 혐오스러운 인간 냄새는 어떤 반인반신의 존재도 감출 수 있을 만큼 강해. 그 카마로에 타고 한번 숨을 들이 마시자마자 알았지. 가브가 몇 년 동안 네 냄새를 감춰 주고 있었다는 걸. 여름 마다 그 남자와 같이 지내지 않았더라면 괴물들은 오래전에 널 발견했을 거야. 네 엄마는 널 지키기 위해 그 남자와 같이 있었던 거야. 똑똑한 분이었어. 그 남 자를 참아 내다니, 널 정말 많이 사랑하신 게 틀림없어…… 그런다고 네 기분 이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애써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엄마를 다시 볼 거라고. 엄마는 가 버리신 게 아니라고. 그로버가 이토록 뒤엉킨 지금의 내 감정도 읽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그 로버와 아나베스가 함께 있어 줘서 기뻤지만, 정직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 꼈다. 나는 내가 이 무모한 탐색에 나서기로 한 진짜 이유를 털어놓지 않은 것 이다. 사실 난 제우스의 번개 화살을 되찾는 일이나 세상을 구하는 일, 심지어 아빠 를 곤경에서 구하는 일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엄마를 도와 주지 않았고, 형편없는 양육비조차 한 번 보내준 적이 없는 포세이돈이 원망스러웠다 . 아빠가 나를 인정한 것은 오직 필요한 일 이 있어서였다. 내 관심은 오직 엄마뿐이었다. 하데스가 부당하게 엄마를 데려갔으니, 반드시 돌려받고 말 것이다. 마음 속에서 오러클이 속삭였다. ‘너는 너를 친구라 부르는 이에게 배신당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을 구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닥쳐.’ 비는 계속 내렸다. 버스를 기다리며 불안한 시간을 보내던 우리는 그로버의 사과 한 알로 제기차 기 비슷한 놀이를 하기로 했다. 아나베스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무릎으로, 팔꿈치로, 어깨로, 어디로도 사과를 쳐 낸 것이다. 나도 나쁘지는 않았다. 놀이는 내가 그로버에게 보낸 사과가 그로버의 입으로 날아가면서 끝났다. 염 소의 큼지막한 입속으로 우리의 제기는 사라져 버렸다. 씨고 줄기고 할 것 없 이. 그로버는 얼굴이 달아올라 사과하려고 했지만, 아나베스와 나는 웃느라 정신 이 없었다. 마침내 버스가 왔다. 승차 줄에 서자 그로버는 주위를 둘러보며 학교 식당에서 제일 좋아하는 메뉴인 엔칠라다 냄새를 맡을 때처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내 질문에 그로버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 아무것도 아닐지도.”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나도 어깨 너머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마침내 버스에 올라 맨 뒤에 나란히 앉을 자리를 찾자 마음이 놓였다. 우리는 배낭을 실었다. 아나베스는 초조하게 양키스 모자로 허벅지를 툭툭 치고 있었 다. 마지막 승객이 올라타는데 아나베스가 내 무릎을 눌렀다.
“퍼시.” 노부인 하나가 버스에 막 오르고 있었다. 구깃구깃한 벨벳 드레스에 레이스 장 갑을 끼고, 얼굴을 가리는 볼품 없는 오렌지색 니트 모자를 썼으며, 페이즐리 무늬가 들어간 커다란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히 들자 검 은 눈이 번쩍였고, 내 심장은 철렁했다. 도즈 선생이었다. 더 늙고 더 말랐지만 그 사악한 얼굴은 똑같았다. 그 뒤로 노부인이 두 명 더 올라탔다. 한 명은 녹색 모자를, 한 명은 자주색 모 자를 썼다. 그 외에는 도즈 선생과 판박이였다. 굳은살 투성이 손도, 페이즐리 무늬 핸드백도, 주름진 벨벳 드레스까지도 똑같았다. 세쌍둥이 마귀할멈이었 다. 그들은 맨 앞줄, 운전사 바로 뒤에 앉았다. 통로 쪽에 앉은 둘은 통로 위로 다 리를 교차해서 X 자를 만들었다. 자연스러운 동작 같았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 다. 아무도 나가지 말 것. 버스가 정류장을 떠났고, 우리는 미끄러지듯 맨해튼 거리를 뚫고 달렸다. 나는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오래 죽어 있지도 않았잖아. 평생 쫓아 버린 걸 수도 있다고 했는데.” 아나베스가 대꾸했다. “운이 좋으면 그렇다고 했지. 네가 운이 없는 건 분명하네.” 그로버가 훌쩍였다. “셋이 한꺼번에 오다니. 불사의 신들이여!” 아나베스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말했다. “괜찮아. 푸리아이. 지하 세계 최악의 괴물이 셋. 문제 없어. 문제 없어. 그냥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거야.” 그로버가 끙끙거렸다. “안 열려.” 아나베스가 다시 제안했다. “뒷문은?” 그런 건 없었다. 있다고 해도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무렵 우리는 9 번 가에 접어들어 링컨 터널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증인들이 있는 곳에서 우릴 공격하진 않을 거야. 아닌가?” 아나베스가 내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인간은 눈이 좋지 않아. 인간의 뇌는 ‘안개’ 너머로 보이는 일만 처리할 수 있 다고.” “세 노파가 우릴 죽이는 건 볼 거 아냐?” 아나베스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판단하기 어려워. 하지만 인간들의 도움을 기대할 순 없어. 지붕에 있는 비상 구는?” 우리는 링컨 터널에 들어섰고, 버스는 통로를 따라 달려 있는 야간 등을 빼고 는 캄캄했다. 빗소리 외에는 무서우리만큼 조용했다. 도즈 선생이 일어서더니 연습이라도 한 것 같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버스 전체 에 대고 선언했다. “화장실에 다녀와야겠어 .” “나도.” 두 번째 자매가 말했다.
“나도.” 세 번째 자매가 말했다. 그리고 셋 모두 통로를 따라 뒤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나베스가 말했다. “생각났어. 퍼시, 내 모자 써.” “뭐라고?” “저들이 원하는 건 너야. 투명해져서 통로를 따라 나가. 그들 옆을 지나쳐 가라 고. 어쩌면 앞으로 가서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희는…….” “우리를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도 있어. 넌 빅 3 의 아들이잖아. 네 냄새가 압 도적일지도 몰라.” “너희를 두고 갈 순 없어.” 그로버가 말했다.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가!” 손이 떨렸다. 겁쟁이가 된 기분이었지만, 나는 양키스 모자를 받아서 썼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 몸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나는 살금살금 통로를 따라 전진하기 시작했다. 열 줄쯤 간 다음 빈 자리에 몸 을 숙이고 들어가서 푸리아이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도즈 선생이 걸음을 멈추고 킁킁거리더니 나를 똑바로 보았다. 심장이 쿵쾅거 렸다. 아무래도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도즈 선생과 그 자매들은 계속 걸어갔다. 나는 자유였다. 버스 앞쪽까지 걸어갔다. 버스는 이제 링컨 터널을 거의 빠져 나갈 참이었다. 비상 버튼을 막 누르려는데 뒷줄에서 끔찍한 괴성이 들려왔다. 그들은 더 이상 노부인이 아니었다. 얼굴은 그대로였다. 더 이상 추해질 수도 없었겠지…… . 그러나 몸은 오그라들어 박쥐 날개와 가고일(큰 사원의 지붕 등 에 설치해 망을 보는 역할을 부여 받은 괴물 형상) 같은 손발이 달린 추악한 가 죽 빛의 노파 몸으로 변해 있었다. 핸드백은 불채찍으로 변했다. 세 노파는 그로버와 아나베스를 에워싸고 채찍을 휘두르면서 듣기 싫은 소리 로 외쳤다. “어디 있지? 그건 어디 있어?” 버스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좌석 아래로 몸을 굽혔다. 그러 니까 뭔가 보이긴 하는 거로군. 아나베스가 외쳤다. “퍼시는 여기 없어! 가 버렸다고!” 세 푸리아이는 채찍을 들어 올렸다. 아나베스는 청동 단검을 뽑았다. 그로버는 간식 가방에서 빈 깡통을 꺼내어 던 질 준비를 했다. 다음 순간 내가 한 행동은 너무나 충동적이고 위험해서 올해의 주의력 결핍 과 잉 행동 장애 아동 포스터로 선정되어야 할 정도였다. 버스 운전사는 혼란에 빠져서 뒷거울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보려 하고 있었 다. 나는 투명한 상태로 운전대를 잡고 왼쪽으로 확 꺾었다. 다들 오른쪽으로 내팽 개쳐지면서 악을 썼고, 원하던 대로 분노의 세 자매가 창문을 강타하는 소리를 들었다. 운전사가 외쳤다.
“이봐! 이봐…… 어어어!” 운전사와 나는 운전대를 잡고 씨름을 했다. 버스는 터널 옆을 들이받았고, 우 리 뒤로 1 킬로미터 넘게 불티를 튀기며 금속이 갈려 나갔다. 사람과 괴물들이 안에서 굴러다니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된 버스는 옆에 있던 차들을 볼링 핀처럼 쓰러뜨리면서 링컨 터널을 빠져나와 폭우 속을 달렸다. 운전사는 어찌어찌 빠져나갈 방도를 찾아냈다. 우리는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신호등 열두 개를 통과한 다음,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한적한 뉴저지 시골길로 질 주해 내려갔다. 왼쪽에는 숲이, 오른쪽에는 허드슨 강이 자리했는데, 운전사는 강 쪽으로 방향을 틀 것 같았다. 또 한 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비상 브레이크를 밟았다. 버스가 울부짖으며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나무들을 들이받 았다. 비상등이 켜지고 문이 열렸다. 버스 운전사가 제일 먼저 나갔고, 승객들 이 고함을 질러 대며 그 뒤를 따랐다. 나는 운전석에 비켜서서 사람들을 지나 보냈다. 균형 감각을 되찾은 세 푸리아이는, 고대 그리스어로 물러서라고 외치면서 단 검을 휘두르고 있는 아나베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로버가 깡통을 던졌다. 나는 열린 문을 보았다. 자유롭게 나갈 수 있었지만, 친구들을 두고 갈 수는 없 었다. 나는 투명 모자를 벗었다. “어이!” 푸리아이들은 돌아서서 나에게 누런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순간 비상구로 나 가는 것이 훌륭한 생각처럼 여겨졌다. 도즈 선생은 수업 시간에, 딱 나에게 F 학 점을 받은 시험지를 주러 올 때처럼 통로를 따라 다가왔다. 도즈 선생이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가시 돋친 가죽을 따라 붉은 화염이 춤을 추었다. 추악한 두 자매는 도즈 선생 양쪽에 있는 좌석 위로 뛰어오르더니 커다랗고 역 겨운 도마뱀처럼 내 쪽으로 기어 왔다. “페르세우스 잭슨.” 도즈 선생이 조지아보다 훨씬 더 남쪽임이 분명한 억양으로 말했다. “너는 신들을 거역했다. 죽어야 한다.” “당신은 수학 교사일 때가 더 나았는데.” 도즈 선생이 으르렁거렸다. 아나베스와 그로버가 틈을 노리며 그들 뒤로 조심스럽게 접근해 왔다. 나는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역조’가 번득이는 양날 검으로 늘어났다. 푸리아이들이 머뭇거렸다. 도즈 선생은 ‘역조’의 칼 맛을 본 적이 있으니, 다시 봐서 좋을 리는 없을 것이 다. 도즈 선생이 듣기 싫은 소리로 말했다. “지금 항복하면 영원한 고문으로 고통받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대꾸했다. “시도는 좋으셔.” 아나베스가 외쳤다. “퍼시, 조심!” 도즈 선생이 검을 쥔 내 손에 채찍을 때리는 동시에 양쪽에 있던 둘이 내게 돌 진했다.
불에 녹인 납을 손에 뒤집어쓴 느낌이었지만, 가까스로 ‘역조’를 놓치지 않았 다. 나는 칼자루로 왼쪽에 있는 푸리아이를 때려 좌석으로 나자빠지게 만들었 다. 돌아서서 오른쪽에 있는 푸리아이를 베었다. 칼날이 목에 닿자마자 푸리아 이는 비명을 지르며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아나베스가 레슬링 하듯 도즈 선생 을 잡고 뒤로 잡아당기는 사이 그로버가 손에 든 채찍을 빼앗았다. 그로버는 소 리를 질렀다. “으악! 으악! 뜨거워! 뜨거워!” 방금 전 검 자루에 맞은 푸리아이가 발톱을 세우고 다시 다가왔지만, 내가 ‘역 조’를 휘두르자 종이 인형처럼 흩어졌다. 도즈 선생은 등에 붙은 아나베스를 떼어 내려 하고 있었다. 도즈 선생이 차고 할퀴고 쉭쉭거리고 물어뜯었지만 , 아나베스는 그로버가 빼앗은 채찍으로 도즈 선생의 다리를 묶는 동안 버텨 냈다. 마침내 둘은 함께 도즈 선생을 통로 뒤로 떠밀었다. 그는 일어나려고 바동거렸지만 , 박쥐 날개를 퍼덕일 공간이 없어서 계속 넘어졌다. “제우스가 널 끝장낼 것이다! 하데스가 네 영혼을 가질 것이다!” 도즈 선생의 저주에 나는 마구 외쳤다. “브라카스 메아스 베스키미니!” 그런 라틴어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내 바지나 먹어 라!’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천둥소리가 버스를 흔들었다. 목잘덜미 털이 쭈뼛 섰다. “나가! 지금!” 아나베스가 외쳤다. 특별히 용기가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밖으로 달려 나가 보니 다른 승객들이 멍한 상태로 방황하며 운전사와 싸우거 나 빙글빙글 돌면서 “우린 죽을 거야!”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 고 카메라를 든 관광객 하나가 미처 검에 뚜껑을 씌우기 전에 내 사진을 찍었 다. 그로버가 문득 깨달았다. “우리 가방! 우리 가방을 두고…….” 콰과과과광! 승객들이 몸을 피하려고 달리는 사이에 버스 창문이 터졌다. 벼락이 버스 지붕 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 놓았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성난 울음소리가 도즈 선생 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아나베스가 말했다. “뛰어! 지원군을 부르고 있어! 여길 벗어나야 해!” 우리는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불타는 버스를 뒤로 하고 숲 속으로 돌진했다. 앞에는 어둠뿐이었다 . 제 11 장 M 아줌마네 가게 어떤 면에서, 세상 어딘가에 그리스 신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좋은 일 이다. 일이 꼬일 때 비난할 상대가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마귀할멈들에게 공격당하고 벼락을 맞아 불타는 버스에서 도망쳤는데 비까지 내리는 상황이라 면, 대부분은 그저 운이 정말 없었나 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반쪽 피라 면 어떤 신이 일을 망치려고 작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 아나베스와 그로버와 나는 뉴욕 시의 불빛에 노랗게 물든 밤 하늘을 등지고, 허드슨 강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뉴저지 강둑을 따라 숲 속을 걷고 있었다.
그로버는 공포에 질려 동공이 가늘어진 염소 눈으로 벌벌 떨면서 힝힝거렸다. “‘친절한 그들’이 셋, 셋이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나도 상당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아직도 버스 창문이 폭발하는 소리가 귓가 에 울렸다. 그러나 아나베스는 계속 우리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서둘러! 멀리 갈수록 나아지는 거라고.” 나는 아나베스에게 일깨워 줬다. “우리 돈은 다 저 뒤에 있었어. 음식과 옷도. 전부 다.” “네가 싸움에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았겠어? 너희가 죽게 놔뒀어야 해?” “날 지켜 줄 필요는 없어, 퍼시. 난 괜찮았을 거야.” 그로버가 끼어들었다. “샌드위치 빵처럼 썰리긴 했겠지만 괜찮았겠지.” 아나베스가 말했다. “입 다물어, 염소 소년.” 그로버가 애처롭게 힝힝거렸다. “깡통……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깡통 한 가방이.” 우리는 썩은 빨래 냄새가 나는 기분 나쁘게 배배 꼬인 나무들을 뚫고 진흙탕을 헤치고 나아갔다. 몇 분 뒤 아나베스가 내 옆으로 붙었다. “저기 말야.” 아나베스는 잠시 멈칫했다. “네가 우리를 위해 돌아와 준 건 고마워, 알았지? 그건 정말 용감한 행동이었 어.” “우린 한 팀이잖아. 안 그래?” 아나베스는 말없이 몇 걸음을 더 옮겼다. “단지 네가 죽어 버렸다면…… 네게도 정말 재수 없는 일이겠지만, 탐색도 그 걸로 끝이라는 뜻이거든. 나한테는 이번이 현실 세계를 볼 유일한 기회일 수도 있어.” 뇌우가 겨우 조금 잦아들었다. 뒤쪽에 비추던 도시의 불빛이 사그라져 우리는 거의 완전한 암흑 속에 잠겼다. 아나베스도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 외에는 전 혀 보이지 않았다. “일곱 살 때부터 한 번도 반쪽 피 캠프를 떠나지 않았단 말이야?” “그래. 짧은 현장 학습 몇 번을 빼면. 우리 아빠는…….” “역사 교수님 말이지?” “그래. 난 집에서 사는 게 잘 맞지 않았어. 그러니까, 반쪽 피 캠프가 내 집이 야.” 아나베스는 이제 누군가가 가로막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빨리 말을 쏟아 내 고 있었다. “캠프에서는 훈련을 하고 또 하잖아. 그것도 다 멋지고 좋지만 현실 세계는 괴 물들이 있는 곳이란 말이야. 자신이 뛰어난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것도 현실 세 계에서고.” 더 잘 알지 못했더라면 아나베스의 목소리에 의혹이 담겨 있다고 단언했을 것 이다. “단검 아주 잘 쓰던데?” “그렇게 생각해?”
“난 푸리아이의 등에 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아.” 실제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나베스가 웃은 것 같았다. “있지, 말해 둬야 할 것 같은데, 버스에서 이상한 점이…….” 아나베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문당하는 올빼미의 울 음소리 같은, 귀에 거슬리는 투, 투, 투 소리에 끊겼다. 그로버가 외쳤다. “봐, 갈대 피리는 아직 소리가 나! ‘길 찾기’ 노래만 기억해 낸다면 이 숲을 빠 져나갈 수 있을 텐데!” 그로버는 음을 몇 번 더 불었지만, 여전히 힐러리 더프의 노래가 아닌지 미심 쩍은 선율이었다. 길을 찾는 대신 나는 바로 나무를 하나 들이받고 머리에 그럴싸한 혹을 달았 다. 내가 갖지 못한 초능력 목록에 추가: 적외선 시야. 걸려 넘어지고 욕을 하고 대체로 비참한 기분을 느끼면서 1.5 킬로미터 정도를 더 가자 앞쪽에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온등 불빛이었다. 음식 냄새가 났 다. 기름지고 튀긴, 끝내 주는 음식 냄새였다. 나는 문득 포도와 빵과 치즈와 정 령들이 기름기를 지나치게 제거해 준 바비큐로 살아가는 반쪽 피 언덕에 도착 한 이래로, 건강에 해로운 음식은 한 입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 몸엔 더 블 치즈버거가 필요했다. 계속 걷다 보니 나무 사이로 황량한 2 차선 도로가 보였다. 길 건너편에는 문을 닫은 주유소와 너덜너덜해진 1990 년대 영화 광고판, 그리고 문을 연 가게가 딱 하나 있었다. 바로 그곳이 네온등 불빛과 맛있는 냄새의
진원지였다. 내가 바라던 패스트푸드점은 아니었다. 잔디밭용 플라밍고와 나무로 조각한 인디언과 시멘트 곰 같은 것들을 파는 수상한 길가 골동품 가게였다. 주 건물은 길고 낮은 창고였는데, 그 주위를 수많은 조각상이 감싸고 있었다. 정문 위에 걸린 네온등은 나로선 읽는 것이 불가능했다. 내 난독 증상에 영어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바로 빨간색 네온등 불빛에 필기체로 쓴 영어 간판이었다. 나에게는 그 글자가 이렇게 보였다. ‘메메 아유 자우란 우노 매잔.’ “도대체 뭐라는 거야?” 내가 묻자 아나베스가 대답했다. “나도 몰라.” 아나베스가 읽기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나와 마찬가지로 난독증이라는 걸 깜 박했다. 그로버가 대신 읽어 줬다. “M 아줌마의 정원용 노움 판매점.” 제목 그대로 입구 양쪽에 시멘트로 만든 정원용 노움(땅 속의 보물을 지키는 땅 신령, 도깨비 따위를 본떠 만든 조각상) 둘이, 그러니까 턱수염이 달린 못생 긴 난쟁이 둘이서 사진이라도 찍으려는 것처럼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모습으 로 서 있었다. 나는 햄버거 냄새를 따라 길을 건넜다. 그로버가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저기…….” 아나베스가 말했다. “안에 불은 켜져 있어. 열려 있을지도 몰라.”
“간이식당이라도.” “간이식당이라도 .” 내가 동경하듯 말하자 아나베스도 의견을 같이했다. “너희 둘 다 미쳤어? 여긴 수상하다고.” 우리는 그로버를 무시했다. 가게 앞쪽은 조각상의 숲이었다. 시멘트 동물들, 시멘트 아이들, 심지어 피리 를 부는 사티로스 시멘트상도 있었다. 그걸 보고 그로버는 소름 끼쳐 했다. “부르르르! 꼭 페르디난드 삼촌처럼 생겼는데!” 우리는 창고 문 앞에 멈췄다. 그로버가 애걸했다. “두드리지 마. 괴물 냄새가 난단 말이야.” 아나베스가 말했다. “푸리아이 냄새가 코를 막고 있는 거겠지. 난 버거 냄새밖에 안 나는 걸. 배 안 고파?” 그로버가 경멸조로 말했다. “고기라니! 난 채식주의자야 .” 내가 기억을 환기시켰다. “치즈 엔칠라다와 알루미늄 캔은 먹잖아.” “그건 식물성이야. 제발 여기서 떠나자. 조각상들이 날 보고 있단 말이야.” 그 순간 문이 삐걱 열렸고, 우리 앞에는 키가 큰 중부 유럽 혈통의 여자가 서 있었다. 손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감싸는 긴 검은색 옷을 입었고, 머리도 베일 에 가려져 있었으니 중부 유럽 혈통이라는 건 내 추측이었다. 검은 천 너머에서 눈이 반짝이긴 했지만,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게 다였다. 커피색 손 은 나이 들어 보였지만 깔끔하게 매니큐어를 칠했고, 전체적으로 우아해서 옛 날에는 상당히 아름다웠을 것 같았다. 억양에서도 중부 유럽 느낌이 났다. “얘들아, 너희끼리 나와 있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로구나. 부모님은 어디 계시 지?” 아나베스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음…….” 내가 말했다. “저흰 고아예요.” “고아라고?” 그 할머니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다르게 들렸다. “하지만 아가들아! 그럴 수가!” “여행단과 떨어져 버렸어요. 우리 서커스단요. 단장님께서 길을 잃으면 주유 소에서 만나자고 하셨는데, 잊어버리셨거나 다른 주유소로 가셨나 봐요. 어쨌 거나 저흰 길을 잃었어요. 저거 음식 냄새인가요?” “세상에, 우리 아가들. 들어와라, 불쌍한 아이들아. 난 M 아줌마란다. 창고 뒤 쪽으로 쭉 들어가렴. 거기에 식당이 있단다.” 우리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나베스가 나에게 중얼거렸다. “서커스단이라고 ?”
“언제나 전술이 있다며?” “네 머리는 해초로 가득 찼어.” 창고 내부도 조각상으로 가득했다. 모두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표정에 다른 자 세를 취한 사람들의 조각이었다. 하나같이 실물 크기여서, 이런 조각상을 세워 두려면 정원이 꽤 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관심은 대부분 음식에 쏠려 있었다. 그래, 배가 고프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수상한 여자의 가게에 걸어 들어가다 니 멍청이라고 불러도 좋지만, 난 가끔 충동적인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게다가 M 아줌마의 버거 냄새를 맡아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그 향기는 다른 모든 생각을 지워 버린다는 점에서 치과에 앉아서 맡는 아산화질소(웃음 가스)와 비 슷했다. 나는 그로버의 불안한 힝힝 소리도, 나를 따라오는 것 같은 조각상들의 눈동자도, M 아줌마가 뒤에서 문을 잠갔다는 사실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신경은 식당을 찾는 데에만 쏠려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식당은 창고 뒤쪽 에 있었다. 그릴과 탄산음료 용기와 프레첼 굽는 기계와 나초 치즈 자동판매기 가 갖춰진 패스트푸드 카운터였다. 게다가 카운터 앞에 강철로 만든 야외 식탁 도 몇 개 놓여 있었다. M
아줌마가 말했다.
“자, 앉으렴.” 내가 말했다. “끝내 주네요.” 그로버가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어, 저흰 돈이 없는데요.” 내가 그로버의 배에 주먹을 날리기 전에 M 아줌마가 말했다. “아니, 아니란다, 얘들아. 돈은 필요 없어요. 이건 특별한 경우잖니? 착한 고아 들에게 내가 대접하는 거란다.” 아나베스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M
아줌마는 아나베스가 뭔가 잘못 말한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는데, 워낙 순식 간에 다시 긴장을 풀어서 나는
내가 잘못 봤나 보다고 생각했다. “괜찮단다, 아나베스야. 정말 아름다운 회색 눈이로구나.” 우리가 소개도 안 했는데 그 여자가 어떻게 아나베스의 이름을 알았을까 궁금 해진 건 나중 일이었다. M
아줌마는 카운터 뒤로 사라져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정신 을 차리기도 전에 더블
치즈버거와 바닐라 셰이크, 특대형 감자튀김이 쌓인 플 라스틱 쟁반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버거를 반 이상 먹어 치우고서야 숨 쉬는 것을 기억해 냈다. 아나베스는 셰이크를 후루룩 빨았다. 그로버는 감자튀김을 집었고, 그쪽에 더 손이 간다는 듯이 쟁반에 깔린 기름종 이를 노려보았지만 , 여전히 불안해서 먹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로버가 물었다. “이 쉭쉭거리는 소리는 뭐죠?” 나는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나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M
아줌마가 물었다.
“쉭쉭거리는 소리? 튀김 기름 소리가 들리나 보구나. 귀가 예민하구나, 그로 버.” “귀를 위해 비타민을 먹거든요.” “감탄스럽구나. 하지만 부디 긴장을 풀렴.” M
아줌마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요리할 때조차도 베일을 벗지 않았고, 지금 은 몸을 앞으로 내밀고 앉아서
손가락을 엇갈아 꼬며 우리가 먹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얼굴을 볼 수 없는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조금 불 안한 일이었지만, 나는 버거를 먹은 뒤 포만감에 젖어 있었고 조금 졸린 상태였 다. 그리고 주인과 잡담을 나누려고 시도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노움을 파시는군요.” 나는 흥미롭다는 듯이 말하려고 노력했다. “아, 그렇단다. 그리고 동물들도. 또 사람들도 팔지. 무엇이든 정원 장식용으로 팔아. 주문 제작도 하고. 조각상은 인기가 아주 좋거든.” “이 길에서도 많이 팔리나요?” “그리 많지는 않단다. 고속도로가 개통된 다음부터는…… 이젠 대부분 차가 이쪽 길로 다니지 않거든. 그래서 만나는 모든 고객을 소중히 대해야 하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목이 따끔거렸다. 돌아보았지만 부 활절 바구니를 든 소녀 조각밖에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세밀했고, 대개의 정원 조각상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였다. 그러나 얼굴에는 문제가 있었다. 깜짝 놀랐 거나 겁에 질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M
아줌마가 슬픈 듯 말했다.
“아, 내 작품 중에 그렇게 잘 만들지 못한 게 있다는 걸 알아보는구나. 저건 망 쳤어. 팔리지 않아. 얼굴은 제대로 만들기가 제일 어려운 부분이지. 언제나 얼 굴이 문제야.” “이 조각들을 직접 만드세요?” “그렇단다. 옛날에는 언니 둘이 일을 도와줬지만, 언니들도 가 버리고 이 아줌 마 혼자 남았어요. 나한테는 조각상들뿐이란다 . 조각상을 만드는 것도 그래서 야. 유일한 내 벗이거든.” M
아줌마의 목소리에 깃든 슬픔이 너무 깊고 진지해서 불쌍한 마음을 갖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아나베스가 먹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몸을 내밀면서 말했다. “두 언니라고요?” “끔찍한 이야기란다. 정말이지 아이들이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야, 알겠니? 아나베스야, 오래 전 내가 젊었을 때 어떤 나쁜 여자가 날 질투했단다. 나에겐 애인이 있었는데, 이 나쁜 여자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기로 결심한 거야. 그 여 자는 끔찍한 사고를 일으켰어. 우리 언니들은 내 곁에 머물면서 내 불운을 가능 한 한 오래 함께 나눴지만, 결국에는 둘 다 떠나고 말았단다. 사라져 버렸어. 나 홀로 살아남았지만, 대신 비싼 값을 치러야 했지. 너무나 비싼 값을 말이다.”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동정심을 느꼈다. 눈꺼풀이 점점 무 거워지고, 부른 배 때문에 졸음이 왔다. 불쌍한 아줌마. 누가 저렇게 착한 사람 을 해치고 싶어 했을까? 아나베스가 주의를 끌려고 내 몸을 흔들고 있었다. “퍼시? 우리 가야 할 것 같아. 단장님이 기다리실 거야.” 긴장된 목소리였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로버는 이제 쟁반에서 뜯어 낸 기름종이를 먹고 있었는데, M
아줌마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 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M
아줌마가 아나베스에게 다시 말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회색 눈이로구나. 그래, 내가 그런 회색 눈을 본 건 아주 오 래 전 일이었지.” M
아줌마는 아나베스의 뺨을 건드리려는 것처럼 손을 뻗었지만, 아나베스가 벌떡 일어섰다.
“우린 정말 가야 해요.” “그래!” 그로버가 기름종이를 삼키고 일어섰다. “단장님이 기다리실 거야! 맞아!”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배도 부르고 만족스러웠다. M 아줌마는 너무 친절했 다. 나는 한동안 M 아줌마와 같이 있고 싶었다. M
아줌마가 간절히 요구했다.
“제발, 얘들아. 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일이 아주 드물단다. 가기 전에 하다못 해 앉아서 자세라도 취해 주면 안 되겠니?” “자세라뇨?” 아나베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말이다. 새로운 조각상에 모델로 쓸 거야. 알겠지만 아이 들은 아주 인기가 좋아요. 다들 어린아이를 좋아하지.” 아나베스는 이쪽 발에서 저쪽 발로 무게를 옮겼다.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가자, 퍼시…….” “해 드릴 수 있고말고요.” 나는, 너무 두목 행세를 하려 들고 공짜로 밥을 먹여 준 노부인에게 그토록 무 례하게 구는 아나베스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냥 사진이잖아, 아나베스. 나쁠 것 있겠어?” M
아줌마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단다, 아나베스. 나쁠 것이 없어요.” 불만스럽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나베스도 M 아줌마를 따라 현관 앞 조각상이 즐비한 정원으로 나가는 데 동의했다. M
아줌마는 우리를 사티로스 석조상 옆에 놓인 벤치로 데려갔다.
“자, 정확하게 위치를 잡아 주마. 꼬마 숙녀가 가운데에 서고, 꼬마 신사 둘이 양쪽에 서자.” “사진 찍기엔 빛이 별로 없는데요.” 내가 말했다. “아, 이 정도면 충분해.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정도는 되잖니?” “사진기는 어디 있죠?” 그로버가 물었다. M
아줌마는 촬영 화면이라도 보는 것처럼 뒤로 물러섰다.
“흠, 얼굴이 제일 어렵지. 다들 날 위해 활짝 웃어 줄 수 있겠니?” 그로버는 옆에 있는 시멘트 사티로스 조각상을 보고 중얼거렸다. “진짜 페르디난드 삼촌이랑 닮았어.” M
아줌마가 그로버를 나무랐다.
“그로버, 이쪽을 보렴.” M
아줌마는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았다.
아나베스가 말했다. “퍼시!” 본능은 아나베스의 말을 들으라고 경고했지만, 나는 포만감과 M 아줌마의 목 소리가 불러온 편안한 졸음의 파도와 싸우고 있었다. M
아줌마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다오. 아무래도 이 망할 베일을 쓰고서는 너희를 잘 볼 수가 없 구나.” “퍼시, 뭔가 잘못됐어.” 아나베스가 말했다. “잘못됐다고?” M
아줌마가 베일을 벗으려고 손을 뻗으면서 말했다.
“천만에, 아가야. 오늘 밤 정말 귀한 벗들을 맞이했는데 뭐가 잘못될 수 있겠 니?” 그로버가 숨을 들이켰다. “진짜 페르디난드 삼촌이야!” “눈을 돌려!” 아나베스가 외치더니 양키스 모자를 쓰고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로버 와 나를 벤치 밖으로 밀어냈다. 나는 땅에 엎어져서 M 아줌마의 샌들을 보았다. 한쪽에서 그로버가, 다른 쪽에서 아나베스가 기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멍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위쪽에서 낯설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시선은 M 아줌마의 손까지 올라갔는데, 그 손은 손톱 대신 날카로운 청동 발톱이 달린 혹투성이 손 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더 위쪽을 볼 뻔했지만, 왼쪽 어딘가에서 아나베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보지 마!”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더 났다. 작은 뱀들이 내는 소리가 내 바로 위 M 아줌마 의 머리가 있을 만한 위치에서 나고 있었다. “달아나!” 그로버가 “매애.” 하고는, 자갈 위를 달리며 날개 달린 운동화를 가동하기 위 해 “마이아!”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M 아줌마의 울퉁불퉁한 손을 바라보며, 그녀가 불어넣은 넋 나간 최면 상태와 싸우려고 애썼다. M
아줌마가 나를 어르며 말했다.
“잘생긴 젊은 얼굴을 망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나와 함께 머물자, 퍼 시. 위만 올려다보면 된단다.” 나는 그 말에 복종하려는 충동과 싸웠다. 그 대신 한쪽으로 눈을 돌려 사람들 이 흔히 정원에 갖다 놓는 장식용 유리구슬을 보았다. 오렌지색 유리에 비친 M 아줌마의 어두운 그림자가 비쳐 보였다. 베일이 사라져 창백하게 번득이는 원 같은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머리 부분에서는 머리카락 뱀들이 움직이며 몸을 뒤틀었다. ‘M 아줌마……, M 아줌마!’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었을까?
나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생각을 해. 신화 속에서 메두사가 어떻게 죽었지? 그러나 생각나지 않았다. 신화 속에서 나와 같은 이름의 영웅 페르세우스한테 공격을 받았을 때 메두사는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깨어 있지 않은가. 메두사는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 발톱을 내리그어 내 얼굴에 상처를 낼 수도 있 었다. “회색 눈의 신이 나에게 이런 짓을 했단다, 퍼시.” 메두사의 목소리는 조금도 괴물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눈을 들라고, 불쌍한 할머니를 동정하라고 나를 꼬드겼다. “아나베스의 어미, 그 저주받을 아테나가 아름다운 여자였던 날 이런 모습으 로 바꿔 놓았어.” 조각상들 사이 어딘가에서 아나베스의 목소리가 외쳤다. “듣지 마! 달아나, 퍼시!” “조용!” 메두사가 호통을 쳤다. 다음 순간 그 목소리는 다시 평온하게 달래는 소리로 돌아왔다. “내가 왜 저 아이를 없애야 하는지 알겠지, 퍼시? 원수의 딸이거든. 저 아이의 조각상은 가루로 만들어 버릴 거야. 하지만 너는, 사랑스러운 퍼시, 너는 고통 받을 이유가 없단다.” “아냐.” 나는 중얼거리며 다리를 움직이려 애썼다. “정말로 신들을 돕고 싶니? 이 멍청한 탐색의 끝에 무엇이 널 기다리는지 알고 있니, 퍼시? 네가 지하 세계에 도착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올림포스 신들의 체스 말이 되지 말아요, 우리 아가. 넌 조각상으로 있는 편이 더 나을 거야. 덜 고통스럽지. 덜 고통스럽고말고 .” “퍼시!” 뒤쪽에서 100 킬로그램짜리 벌새가 급강하를 하는 것 같은 윙윙 소리가 들렸 다. 그로버가 소리를 질렀다. “숙여!” 돌아보니 12 시 방향의 밤하늘 속에서 야구방망이만 한 나뭇가지를 쥐고, 날개 달린 신발을 퍼덕이면서 그로버가 날아오고 있었다. 눈을 꼭 감고 머리를 이쪽 저쪽으로 돌린 채 귀와 코만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말이다. 그로버가 다시 고함 쳤다. “숙여! 내가 맞출게!” 그 말을 듣고서야 몸이 움직였다. 그로버를 알기에, 나는 그로버가 메두사를 놓치고 나를 후려칠 거라 확신했다. 나는 한쪽으로 몸을 날렸다. 콰직! 처음에는 그로버가 나무를 때린 소리인 줄 알았다. 다음 순간 메두사가 고래고 래 소리를 질렀다. “이 구질구질한 사티로스! 널 내 수집품 목록에 넣어 주마!” 그로버도 맞서 소리를 질렀다. “페르디난드 삼촌을 위한 벌이었어!” 나는 그로버가 다시 한 번 내리덮치는 사이에 조각상들 사이로 기어가서 숨었 다. 콰지직! “아악!” 메두사가 고함을 지르자 머리카락 뱀들이 쉭쉭거리고 입김을 뿜어 댔다. 바로 옆에서 아나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퍼시!” 나는 정원용 노움 위로 뛰어오를 만큼 깜짝 놀랐다. “맙소사! 그러지 마!” 아나베스는 양키스 모자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야 해.” “뭐? 너 미쳤어? 여기서 나가자.” “메두사는 위험해. 사악하다고. 내가 직접 죽이고 싶지만…….” 아나베스는 어려운 고백이라도 할 것처럼 침을 삼켰다. “그렇지만 네 무기가 더 좋잖아. 게다가 난 절대 메두사 가까이 못 갈 거야. 엄 마 때문에 날 잘게 썰어 버릴 테니까. 넌…… 너한테는 기회가 있어.” “뭐? 난 못…….” “메두사가 죄 없는 사람들을 더 많은 조각상으로 바꿔 놓길 원해?” 아나베스는 양팔을 두른 채 괴물 손에 돌이 된 연인의 조각상을 가리켰다. 그 리고 가까운 받침대 위에 놓인 녹색 장식구슬을 집었다. “윤이 나는 방패가 나을 텐데.” 아나베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유리구슬을 뜯어보았다. “볼록면이 왜곡을 일으킬 거야. 거울상의 크기가 곡면에 의해…….” “우리말로 좀 말해 줄래?” “그러고 있잖아!” 아나베스는 나에게 유리구슬을 던졌다. “유리에 비친 모습만 봐. 절대 메두사를 직접 봐선 안 돼.” 위쪽 어딘가에서 그로버가 외쳤다. “얘들아! 메두사가 정신을 잃은 것 같아!” “으르르르르!” “아닐 수도 있고.” 그로버는 나뭇가지를 들고 다시 한 번 공격에 들어갔다. 아나베스가 말했다. “서둘러. 그로버는 후각이 뛰어나지만 결국에는 부딪힐 거야.” 나는 펜을 꺼내서 뚜껑을 열었다. 손 안에서 ‘역조’의 청동 검날이 길어졌다. 나는 메두사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쉭쉭 소리를 따라갔다. 눈은 유리구슬에만 고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메두사 말고 거울에 비친 모 습만 보였다. 그것도 녹색 유리에 비친 모습으로. 그로버가 다시 한 번 방망이를 들고 날아오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위치가 약간 낮았다. 메두사는 나뭇가지를 잡아채 그로버의 방향을 틀었다. 그로버는 허공 에서 공중제비를 넘어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와 함께 돌이 된 회색 곰의 팔 안으 로 떨어졌다. 메두사가 그로버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내가 외쳤다. “어이!”
검과 유리구슬을 들고 메두사에게 다가가기란 쉽지 않았다. 메두사가 달려들 었다면 방어하느라 진땀을 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다가가도록 놔두었다. 6 미터, 3 미터……. 이제 구슬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그렇게까지 추하지는 않았다. 유리구슬에 그려진 녹색 소용돌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려 더 추하게 보 이도록 만드는 게 분명했다. 메두사가 낮게 노래하듯 말했다. “넌 늙은 여자를 해치지 않을 거야, 퍼시. 그러지 않을 거라 믿는다.” 나는 유리에 비친 얼굴에 주의를 빼앗긴 채 머뭇거렸다. 녹색 유리를 뚫고 불 타오르는 것 같은 두 눈이 내 팔의 힘을 약하게 만들었다. 곰 조각상이 있는 곳에서 그로버가 신음했다. “퍼시, 듣지 마!” 메두사가 낄낄거렸다. “너무 늦었다.” 메두사는 발톱을 세우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검을 휘둘렀고, 구역질 나는 슈악! 소리가 나더니 동굴 속에서 바람이 불 어 나가듯 슛! 소리가 났다. 괴물이 잘려 나가는 소리였다. 무엇인가가 내 발 옆으로 떨어졌다. 그걸 보지 않으려고 내 모든 의지력을 동 원해야 했다. 나는 따뜻한 분비물이 양말을 적시고, 죽어 가는 작은 뱀들의 머 리가 운동화 끈을 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웩.” 그로버가 신음했다. 눈은 아직 감고 있었지만, 그 물건이 꼴꼴거리며 김을 뿜 는 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었다. “웩 제곱이야.” 아나베스가 시선을 하늘에 고정한 채 내 옆까지 왔다. 손에는 메두사의 검은 베일을 쥐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아나베스는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무릎을 꿇고서 괴 물의 머리에 검은 천을 씌운 다음 집어 들었다. 아직도 녹색 즙이 뚝뚝 떨어지 고 있었다. 아나베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더블 치즈버거를 토할 것 같긴 했지만, 나는 “응.”이라고 말하기로 했다. “왜…… 왜 머리는 사라지지 않은 거지?” “일단 잘라 내면 전리품이 되거든. 미노타우로스의 뿔과 마찬가지야. 하지만 천을 벗기진 마. 아직도 너를 돌로 만들 수 있어.” 그로버가 끙끙거리며 곰 조각상에서 내려왔다. 이마에 커다란 혹이 달려 있었 다. 녹색 모자는 작은 염소 뿔 한쪽에 걸쳐져 있었고, 가짜 발은 발굽에서 벗겨 져 나갔다. 마법 운동화는 목표 없이 그로버 머리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붉은 남작(1 차 세계대전 때 최고의 공군 에이스였던 만프레드 폰 리흐토펜의 별명)께서 오시는군. 잘했어, 친구.” 그로버는 쑥스러운 듯 히죽 웃었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재미는 없었어. 막대기로 메두사를 때릴 때는 좀 재미있 었지만. 콘크리트 곰에 충돌하는 부분은 정말 재미없었어.” 그로버는 허공에 떠 있는 신발을 낚아챘다. 나는 검에 뚜껑을 씌웠다. 우리 셋 은 함께 비틀비틀 창고 안으로 돌아갔다. 음식 주문 카운터 뒤에서 낡은 비닐로 된 식료품 주머니를 찾아 메두사의 머리 를 두 겹으로 쌌다. 우리는 그 머리를 저녁 식사를 했던 식탁 위에 던져 놓고, 말 할 기운도 없이 지친 몸으로 둘러앉았다.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괴물에 대해선 아테나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가?” 아나베스는 화난 표정을 지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네 아빠지. 기억 안 나? 메두사는 포세이돈의 애인이었어. 둘은 우리 엄마 신전에서 만나기로 했지. 그래서 아테나가 메두사를 괴물로 바 꿔 놓은 거야. 메두사와, 그녀가 신전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 준 두 자매는 세 고 르곤이 되었지. 메두사가 날 잘게 조각 내고 싶어 한 것도, 너를 근사한 석상으 로 보관하고 싶어 한 것도 그래서야. 아직도 네 아빠에게 반해 있는 거야. 아마 널 보니 네 아빠가 떠올랐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그러니까 이젠 메두사를 만난 게 내 잘못이란 말이지.” 아나베스가 허리를 펴더니, 전혀 닮지 않게 나를 흉내 낸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사진이잖아, 아나베스. 나쁠 것 있겠어?” “관둬. 넌 정말 싫은 녀석이야.” “넌 참을 수 없이 밉살스러워.” “넌…….” “이봐!” 그로버가 끼어들었다. “너희 둘 때문에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사티로스는 편두통 같은 거 없다고. 그 나저나 저 머리통을 어쩌지?” 나는 그 물건을 바라보았다. 작은 뱀 한 마리가 비닐에 난 구멍으로 몸을 내밀 고 있었다. 비닐 주머니 한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거래해 주셔서 감사합 니다!’ 나는 화가 났다. 아나베스나 그녀의 엄마뿐만 아니라 이 탐색에 나서도록 시킨 모든 신들, 우리를 이 길에 던져 놓고 캠프를 떠난 첫날부터 큰 싸움을 두 번이 나 하게 만든 모든 신들에게 화가 났다. 이런 상황이라면 하지 전까지 도착하기 는커녕 로스앤젤레스까지 살아서 가지도 못할 것이다. 메두사가 뭐라고 했지? ‘올림포스 신들의 체스 말이 되지 말아요, 우리 아가. 넌 조각상으로 있는 편이 더 나을 거야.’ 나는 일어섰다. “금방 돌아올게.” 뒤에서 아나베스가 불렀다.
“퍼시, 너 무슨…….” 나는 창고 뒤쪽을 뒤져서 메두사의 사무실을 찾아냈다. 장부책을 보니 제일 최 근에 여섯 번 판매한 기록이 있었는데, 모두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정원을 꾸 미기 위해 지하 세계로 배송한 기록이었다. 한 운임 청구서에 따르면 지하 세계 건물 주소는 캘리포니아 웨스트 할리우드의 DOA(Dead On Arrival: 의료 용어 로서, 도착할 때 사망했음을 뜻한다) 녹음 스튜디오였다 . 나는 그 청구서를 접 어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현금 계산기에서 20 달러와 드라크마 금화 몇 닢, 그리고 동전을 넣기 위한 작 은 가죽 주머니가 붙어 있는 ‘헤르메스 특급 우편’용 물품 명세서 몇 장을 찾았 다. 나는 사무실 안을 샅샅이 뒤져서 적당한 크기의 상자를 발견했다. 야외 식탁으로 돌아가 메두사의 머리를 포장한 다음 배송 용지에 이렇게 썼다. 뉴욕 주 뉴욕 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600 층 올림포스 산 신들에게 -행복을 빌며, 퍼시 잭슨
그로버가 경고했다. “좋아하지 않을 텐데. 네가 버릇이 없다고 생각할 거야.” 나는 드라크마 금화 몇 닢을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를 닫자마자 현금 계산기에서 나는 것 같은 땡 소리가 났다. 상자가 식탁 위로 떠오르더니 펑! 소 리를 내면서 사라졌다. 내가 말했다. “나 원래 버릇없어.” 나는 비판을 무릅쓰고 아나베스를 쳐다보았다. 아나베스는 비난하지 않았다. 나한테 신들을 화나게 하는 훌륭한 재능이 있다 는 사실에 체념한 것 같았다. 아나베스는 중얼거렸다. “자, 우리에겐 새로운 계획이 필요해.” -2
권에 계속 -
부록: 올림포스 12 신과 괴물소개 올림포스의 12 신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 산 정상에 살고 있는 신들 중 주요한 12 신. 최고 신 제우스와 아내인 헤라, 바다의 신 포세이돈,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음악· 예언·광명의 신 아폴론, 그 쌍둥이 여동생으로 산과 들을 지배하는 사냥의 여 신 아르테미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불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 스, 전쟁의 신 아레스, 신들의 전령이며 상업·목축·여행·음악의 수호신인 헤르 메스,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 화로·불의 여신 헤스티아(또는 풍작 특히 포도와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12 신을 가리킨다.
헤스티아
불과 화로의 여신.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6 명 가운데 맏딸로서 제 우스와 포세이돈의 누나이다. 아폴론과 포세이돈이 자신에게 구혼하며 다투자 영원히 처녀로 살겠다는 맹세를 하여 싸움을 진정시켰다. 이 때문에 올림포스 12 신의 여섯 여신 가운데 아테나와 아르테미스와 더불어 처녀 신으로 남았다. 제우스는 순결을 지킬 권리와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희생을 맨 먼저 받을 권리 를 주었다. 디오니소스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로, 술의 신이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는 세멜레에 질투 를 느낀 헤라는, 제우스가 헤라에게 접근할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도록 세멜레에게 권하였다. 제우스는 세멜라의 소원대로 번 개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세멜레는 그 자리에서 타 죽었다. 그런데 세멜레의 배 속에 있던 디오니소스는 죽지 않고, 제우스의 넓적다리 속에서 자란 끝에 태어 났다. 이렇게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님프의 손에서 자란 후 각지를 떠돌아다니 며 포도 재배를 보급하고 문명을 전달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반쪽 피 여름캠 프의 총책임자인 ‘미스터 D’로 등장한다. 데메테르 곡물, 또는 대지의 여신.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로, 제우스와의 사이에 딸 페르 세포네를 낳았다. 그런데 페르세포네를 짝사랑한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가 그 녀를 납치하여 지하로 데려가자 데메테르는 딸을 찾아서 천계를 떠나 지하세 계로 내려갔다. 데메테르가 천계로 돌아오지 않자 땅의 곡식이 익지 않았다. 이 에 제우스는 하데스에게 페르세포네를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어머니인 데메테 르와 함께 천계로 돌아온 페르세포네는 지하세계에서 석류를 먹었기 때문에 1 년 중 3 분의 1 은 지하에서 하데스와 함께 지내야 했다. 포세이돈 바다의 신. 제우스 다음 가는 신이다. 크로노스와 레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 며, 제우스와 지하세계 신 하데스와는 형제다. 청동의 발굽과 황금의 갈기가 있 는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바다 위를 달리면 이때만은 파도도 잠잠해진다. 말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말을 타고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포세이돈의 상징은 작살 (삼지창)이며, 대양의 신의 딸인 아내 암피트리테로 사이에 트리톤, 페가소스, 오리온을 낳았다. 이 책에서는
주인공 퍼시 잭슨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제우스 올림포스 제일의 신. 티탄이라고 불리는 거인 신족 중의 하나인 크로노스와 그 의 아내 레아의 아들이다. 포세이돈·하데스·헤스티아·데메테르·헤라 등의 동 생으로, 6 형제의 막내이며, 헤라를 아내로 삼고 있다. 제우스는 올림포스의 신 들 위에 군림하고 그 권위는 다른 신들의 권위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컸다. 아 폴론,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 아레스의 아버지이다. 황금비로 변해 아르고스 지방의 왕녀 다나에에게 내려서 페르세우스를 낳았다.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 우스는 이 책의 주인공 퍼시(페르세우스) 잭슨과 이름이 같다. 헤라 질투의 여신.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로, 제우스의 아내이다. 올림포스의 여신 중 최고의 여신이다.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 전쟁(군사)의 신 아레스가 태어났다. 헤파이스토스
불과 대장장이의 신. 신들의 무기, 장신구, 궁전 등을 만들었다.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면서부터 절름발이였는데, 헤라는 이것이 마음에 안 들어 올림포스 산에서 그를 아래 세상으로 떨어뜨렸으나 , 바다의 여신 테티 스가 구해 주고, 9 년 동안 바다에서 길렀다. 그 답례로 트로이전쟁 때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를 위해 무기를 새로 만들어 주었다. 절름발이이며 추남인 그 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삼았다. 아레스 전쟁의 신.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 그는 호전적이지만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청년으로,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아 그녀의 애인이 되었다. 이들 둘 사이 에서 에로스가 태어났다. 아테나 전쟁과 지혜의 여신. 그리스 아테네의 수호신이다. 제우스와 바다 신 오케아노 스의 딸 메티스 사이에 태어났다. 메티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자신의 지위 를 빼앗게 될 것이라는 땅의 신 가이아의 예언을 들은 제우스는, 임신한 메티스 를 삼켜 버렸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날 시기가 되자, 제우스는 심한 두통을 못 견디고 프로메테우스에게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쪼개 달라고 부탁하였고, 그 대로 머리를 쪼개자 그 속에서 아테나가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함성을 지르면 서 태어났다. 신성한 공격용 방패 아이기스를 든, 무장한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신성한 염소가죽으로 만들어진 방패에는 고르곤의 목이 달려 있다. 올빼 미가 아테나의 상징 동물이며, 전차를 발명했고, 옷감을 짜는 기술이 뛰어났다. 아폴론 광명·의술·예언·가축의 신.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 나온 아들이다. 여신 아르테 미스와는 쌍둥이다. 레토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질투로 출산할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델로스 섬으로 도망쳐 가 그곳에서 아폴론을 낳았다. 그는 또한 예언 의 신, 태양의 신이다. 활과 화살이 그의 특징적 무기이다. 아르테미스 제우스와 레토의 딸이며 아폴론과는 쌍둥이다. 처녀사냥꾼으로 산과 들에서 사슴을 쫓는 활의 명수이다. 처녀의 수호신으로서 순결의 상징이다. 아폴론이 태양의 신인 데 반하여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으로 여겨진다. 대지, 특히 들짐 승들이 사는 들판을 주관하는 어머니 신으로서 동식물의 다산과 번성을 책임 진다. 아프로디테 사랑과 미와 풍요의 여신. 제우스와 바다의 정령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편,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의 신체 일부를 잘라 바다에 던졌는데, 그 주 변에 모인 하얀 거품 속에서 알몸으로 태어났다고도 한다. 이후 서쪽 바람의 신 제피로스에게 떠밀려 키테라 섬에 닿았다가 다시 키프로스 섬까지 흘러왔는 데,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그녀를 발견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힌 다음, 여러 신 들의 자리로 안내하였다고 한다. 헤르메스 전령의 신. 제우스와 거인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난 지 얼 마 안 되어서부터 요람에서 빠져나와 아폴론 신의 소를 훔쳤는데, 이때 뒤를 밟
히지 않도록 소의 꼬리를 끌고 뒷걸음질을 치게 할 정도로 총명했다. 갓난아기 때 거북 등껍데기에 양의 창자로 줄을 매어 하프를 발명했는데, 그 음색의 아름 다움에 감동한 아폴론은 하프를 얻는 대신 자기의 소를 훔친 것을 용서했다. 또 한 피리를 만들어 아폴론에게 주었다. 날개 달린 넓은 차양의 페타소스라는 모 자를 쓰고, 발에도 날개가 달린 샌들을 신었으며, 손에는 전령의 지팡이를 들고 있다.
나머지 신, 반쪽 피, 괴물들 고르고(고르곤) ‘바다의 노인’ 가운데 하나인 바다의 신 포르키스와 그의 누이 케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힘’을 뜻하는 스테노, ‘멀리 날다’라는 뜻의 에우리알레, ‘여왕’이 라는 뜻의 메두사 세 자매를 가리킨다. 이들은 뱀으로 된 머리카락에 멧돼지의 몸뚱이와 청동으로 된 손을 지니고 있다. 눈은 항상 부릅뜨고 있으며, 크게 찢 어진 입으로는 웃을 때마다 뱀처럼 긴 혀를 날름거리고 사자코를 하고 있다. 3 명의 요괴로 이루어진 그라이아이와 자매 사이다. 고르고의 눈 또는 머리를 본 사람은 돌로 변해 버린다. 나이아스 물의 정령. 흐르는 물에 깃든 님프. 다른 님프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영역에 속 하면서도 영원한 존재는 아니며, 단지 아주 긴 생명을 지닌 존재들이다. 님프 자연계의 여러 정령. 바다의 정령은 오케아니데스 , 지중해의 정령은 네레이스, 민물의 정령은 나이아스로 불린다. 님프들은 아름답고 젊은 아가씨의 모습을 지녔으며, 춤과 음악을 즐기는 명랑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 는 수도 있지만, 보통은 호의적이다. 들에 꽃을 피게 하고, 목축을 돕기도 하며, 우물에 약효를 주기도 한다. 레아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의 어머니. 크로노스의 아내. 대지의 여신. 천공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로노스의 아내가 되어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를 낳았다. 메두사 고르고라는 세 마녀 중의 하나. 메두사는 불사신인 다른 두 자매와 달리 인간 의 생명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포세이돈과 사귀는 등 아 테나의 신전을 모독하여 아테나의 저주로 무서운 괴물이 되었다. 메두사가 영 웅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렸을 때, 그 피에서 포세이돈의 자식인 날개 달린 천 마 페가소스와 크리사오르가 태어났다고도 한다. 메두사의 목은 아테나의 갑 옷(또는 방패)에 장식으로 붙여졌다. 이 책에서는 ‘M 아줌마’로 등장한다. 미노타우로스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와 포세이돈이 보내온 황소 사이에 나온 괴물. 황소의 머리를 하고 있고, 몸뚱이는 사람이다. 크레타 왕 미노스가 포세이돈과의 약속 을 지키지 않아 그의 노여움을 산 결과였다. 미노스 왕은 건축과 공예의 명장 다이달로스에게 명하여 거대한 미궁을 짓게 한 후, 미노타우로스를 그곳에 가 두었다. 그리고 해마다 아테네에서 7 명씩의 어린 소년 소녀를 괴물에게 산 제 물로 바쳤는데, 세 번째 제물이 바쳐질
때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손에 죽었 다. 이 책에서는 주인공 퍼시 잭슨 일행을 추격하다 퍼시에 의해 물리쳐진다. 키클롭스 거인족. 이마 한가운데 눈이 있는데, 사람을 먹고 양을 기르며 대장간 일에 능 하다. 그들 가운데 폴리페모스가 오디세우스에게 눈을 찔려 장님이 된 적이 있 다. 사티로스 얼굴은 사람의 모습이고, 머리에 작은 뿔이 났으며, 허리 아래로는 염소의 모 습을 하고 있는 반인반수. 이 책에서 퍼시 잭슨의 친구이자 보호자 역을 맡은 ‘그로버’도 사티로스 중의 하나이다. 아르고스 전신에 무수한 눈을 갖고 있는 힘이 센 거인. 대지의 신 가이아의 딸로 통행인 들을 약탈하던 에키드나를 퇴치했으며, 암소로 변신한 제우스의 애인 이오를 감시하라는 헤라의 명을 받았으나, 제우스의 명령을 받은 헤르메스가 잠을 부 르는 피리 소리로 아르고스의 눈을 모조리 감긴 다음 목을 베어 버렸다. 죽어서 공작이 되었다고도 하고, 헤라가 아르고스의 수많은 눈을 공작의 날개에 붙여 장식하였다고도 한다. 이 책에서는 여름캠프의 보안 책임자로 등장한다. 오르페우스 최고(最古)의 시인이며 음악가. 아폴론으로부터 하프를 배웠다. 그가 연주하 면 나무와 돌이 춤을 추고 맹수도 얌전해졌다. 또 아르고 호의 원정에 참가하여 마녀 세이렌들의 넋을 빼는 노래를 하프 연주로 물리쳤다. 님프 에우리디케를 아내로 맞아 매우 사랑했지만, 곧 죽자 아내를 찾아 데려오기 위해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그는 기막힌 하프 솜씨로 하데스를 감동시키고, 아내를 데려가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지상에 돌아갈 때까지 아내를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지 키지 못했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하세계로 사라졌다. 그가 죽었을 때, 하프는 하늘로 올라가 별자리가 되었고, 그는 사후 안식처 엘리시온에서 하프를 타며 신들의 사랑을 받은 영웅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다고 한다. 운명의 세 여신 파테스라고 불린다. 제우스의 딸들로, 운명의 실타래를 통해 인간들의 수명을 결정한다. 클로토는 운명의 실을 뽑아내는 여신, 라케시스는 운명의 실을 짜는 여신, 아르로포스는 그 실을 잘라 생명을 마감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결정에 는 다른 신들도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이 책에서는 과일가게 앞에서 바느질을 하는 세 노파로 나온다. 켄타우로스 테살리아의 라피타이 족의 왕 익시온과 여신 헤라의 모습을 한 구름과의 사이 에서 생긴 괴물. 허리 윗부분은 사람의 모습이고, 아래로는 말의 몸과 네 다리 를 가졌다. 켄타우로스들은 성격이 난폭하고 야만스러웠는데 , 이 책에 브루너 선생님으로 등장하는 키론은 켄타우로스 족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온화하며, 의술, 음악, 무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리스 신화 속의 많은 영웅들을 길 러 냈다. 크로노스
올림포스 제일의 신인 제우스의 아버지. 천공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 이아의 자식인 티탄 신족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신. 크로노스는 누이 레아를 아 내로 삼았고,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 등 6 명의 자 식을 낳았다. 크로노스는 자기 자식에게 지배권을 빼앗긴다는 신탁 때문에 태 어난 자식을 차례로 삼켜 버렸다. 그런데 마지막 제우스가 태어났을 때는 레아 가 크로노스를 속여 대신 돌을 삼키게 함으로써 제우스는 살아남았고, 나중에 형제들을 모두 토해 내게 했다. 페르세우스 제우스와 아르고스의 왕녀 다나에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 시오스는 딸에게서 낳은 자식에게 살해될 것이라는 신탁을 믿고, 다나에를 청 동으로 만든 방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제우스가 황금 의 비로 변신하여 지붕으로 스며들어가 페르세우스를 낳게 하였다. 왕은 다나 에와 페르세우스를 작은 배에 실어 바다에 떠내려 보냈고, 배는 세리포스 섬에 닿아 왕 폴리데크테스의 보호를 받았다. 폴리데크테스는 다나에를 사랑하게 되면서 청년이 된 페르세우스를 방해물로 여겼다. 그래서 그를 없앨 목적으로 무시무시한 메두사의 목을 베어 오도록 명하였다. 이에 아테나가 청동방패를 주면서 가르쳐 준 대로 그라이아이로부터 고르고의 거처를 알아낸 페르세우스 는 청동방패를 거울 삼아 메두사의 모습을 비추게 하여 목을 벤 뒤 자루에 담았 다. 메두사의 두 자매 고르고가 잠에서 깨어 페르세우스를 공격하려 했으나, 헤 르메스가 준 날개 달린 신발과 님프들이 준 모습을 숨기는 모자를 쓰고 무사히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괴수의 제물이 될 뻔한 왕녀 안드로메다를 구해 아 내로 삼았다. 또,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아틀라스를 돌로 바꿔 주어 그를 고통 에서 풀어 주었다. 세리포스로 와서 어머니 곁으로 돌아온 그는 메두사의 목을 폴리데크테스에게 내보여 돌로 만들고, 때마침 열리고 있던 경기대회에서 던 진 원반에 아크리시오스 왕이 맞아 목숨을 잃음으로써 예언이 실현되었다. 메 두사의 목은 여신 아테나에게 바쳐져 여신의 방패에 붙여졌다. 이 책의 주인공 인 퍼시(페르세우스) 잭슨은 그와 이름이 같다. 푸리아이 자매로 이루어진 복수의 세 여신. 머리카락은 뱀이고, 날개를 달고 있다. 이 책 에서는 도즈 선생 등 ‘친절한 그들’로 나온다. 하데스 지하세계 최고의 신. 크로노스와 레아의 아들로 제우스, 포세이돈과 형제간이 다. 크로노스와 그 일족을 정복한 후 제우스는 하늘, 포세이돈은 바다, 하데스 는 죽은 자의 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였다.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아내로 삼았다.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경계에는 스틱스(Styx) 또는 아케 론(Acheron)이라는 강이 있어 나룻배 사공 카론이 죽은 자를 건네준다. 지하세 계 입구에는 죽은 자의 혼이 지상으로 도망 나가지 못하도록 케르베로스 (Cerberos)라는 무시무시한 괴물 개가 감시하고 있다. 헤라클레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힘이 세고 또 가장 유명한 영웅. 제우스와 인간 여자 사 이에서 태어났다. 제우스는 그를 무척 사랑하여 뛰어난 힘과 씩씩한 기상을 주 었고, 암피트리온과 그 밖의 여러 스승으로부터 무예와 음악을 배워 훌륭한 무 인으로 성장하였다. 테베의 왕녀 메가라와 결혼하였으나 , 몇 해 후 여신 헤라의 저주로 정신이상을 일으켜, 메가라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을 죽여 버렸다. 제 정신으로 돌아온 헤라클레스는 테베를